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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리 May 27. 2021

친구야, 주민등록증 좀 빌려줘

한창 볕이 좋은 봄날이다. 미세 먼지도 싹 걷히고 푸르른 하늘이 높다랗게 펼쳐져 있다. 일 년 중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 수 있는 몇 안 되는 봄날에 둘째 아이는 친구와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아이는 멋진 봄날을 향유하며 신바람이 난 시간이지만 이 엄마는 한 조각의 그늘을 찾아 아이의 노는 것을 지켜보 처량한 보초를 서야 했다.


날이 선 봄볕에 지쳐갈 때쯤 핸드폰이 울리고 화면에 반가운 이름이 나타났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같이 보낸 친구였다. 멀리 살고 있다는 핑계로, 그 친구는 아들 셋, 나는 딸 둘을 키우며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연락하지 못하고 있는 친구였다. 그럼에도 핸드폰 화면에 비친 그 이름은 한 줄기 청량한 바람처럼 상쾌하고 반가웠다.


"어!! 친구야, 잘 지내? 웬일이야?"

"응, 잘 지내지? 너무 오랜만에 전화한다.
사실 뭐 부탁할 일이 있어서 전화했어.
이렇게 부탁할 때만 염치없이 전화하게 되네.


이렇게 말문을 연 친구는 사업을 하는 신랑의 회사 세금 문제로 4대 보험에 가입이 되어 있지 않은 지인 몇 명의 신분증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정확히 이해는 되지 않았으나 내 주민등록증 앞면 사진이 필요하니 좀 찍어서 보내줄 수 있느냐는 것이 부탁의 요지였다. 친구는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절대로 나한데 불이익은 없을 거라고 거듭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일용직으로 잠시 등록해두는 것이어서 후에 연말 정산으로 내가 세금 혜택을 받는데 혹여나 불이익이 있을 거라 염려 것을 미리 예방하듯 얘기해줬다.


나는 바로 대답해줬다.

"응, 그럼 빌려줄 수 있지. 바로 사진 찍어서 보내줄게."


친구가 자세하게 이유를 말하지 않았어도 난 그가 부탁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무조건 응해줬을 것이다.


참 신기하지.

요즘 같은 세상에는 확인하고 다시 또 확인해도 뒤통수 맞고 배신당할 수 있다고 사방에서 경고하는데도 나는 이 친구에게 신분증 빌려주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만약 반대로 내가 그 친구에게 똑같은 부탁을 했더라도 그는 단 몇 초도 고민 없이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해줄 것 같았다.


내게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고 오히려 감사였다.


몇 달 전에 출근을 하자마자 신랑에게서 전화가 왔다.

회사 팀 안에 동료 한 분이 급하게 집 매매 대금을 처리하는데 문제가 생겨서 대출이 막혔다며 자신이 돈을 빌려줘야겠다고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전화였다. 동의를 구한다기보다는 자신은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니 자신의 결정을 따라달라는 듯했다.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8천만 원.

한 달 벌어 그 월급으로 우리 대출금을 갚고 생활비를 쓰는 평범한 가정에게 8천만 원이란 목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명의로 마이너스 통장에서 8천만 원을 빼서 빌려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동료였다. 가끔 신랑이 회사 이야기를 할 때 간간히 들려줬던 몇몇 동료들 중 한 명으로 기억되는 낯익은 이름이란 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이렇게 그냥 빌려줘도 되는 거야? 그분 믿을 수 있어?"라고 물었다.


신랑은 바로 대답했다.


"응, 그럼"



그때 신랑에게도 그 동료는 내가 친구에게 느꼈던 것처럼 그 이름 석자로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몇 개월이 지났는데 여전히 그분의 자금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아서 우리가 고스란히 마이너스 8천만 원을 안고 살고 있다. 통장에 찍힌 마이너스 금액을 볼 때마다 헉하며 숨이 막히지만 내 신랑에게 이 불안과 의심을 거두어들일 만큼의 신뢰가 누군가에게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나이가 들 수록 '믿을 수 있는 사람 하나 없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가장 믿었던 가족에게, 형제보다 친하게 지냈다는 친구에게 사기당하고 탈탈 털려서 이제는 그 누구도 신뢰하지 못한 채 홀로 사방에 벽을 쳐두고 사는 이들도 있다. 어쩌면 나와 신랑도 이렇게 사람 좋게 이리저리 선심을 쓰다가 언젠가는 뒤통수를 맞고 상처 받은 마음에 쓰라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까지 사람이 좋다. 모든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신분증을 흔쾌히 내어주고, 마이너스 통장에서 돈을 빼서 빌려줄 수 있을 만큼 좋은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이 좋다.


그 믿음을 먼저 저버리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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