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추리닝, 그 남자의 첫 고백

결혼 12주년을 기념하며...

by 세리


그는 여대 앞에서 회색 추리닝 바지를 입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멀찍이서 그의 실루엣을 발견한 여자는 함께 걷던 친구들에게 화장실이 급해서 들렸다가 갈 테니 먼저들 가라고 다급하게 말한 뒤 다시 돌아 옆 건물로 들어가는 척했다. 친구들이 먼저 교문 밖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여자는 그 남자 앞으로 갔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여자들이 우르르 나오는데 안 부끄럽나 봐요"


"뭐, 상관없지..."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눈빛이 여자에게 고정된 후 그는 대답했다. 공대 대학원생이었던 그는 랩실에서 막 실험을 마치고 나온 직후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회색 추리닝은 너무하지 않나요...'라고 그녀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자존감이 높은 건지, 외모 꾸미는 것에 영 관심이 없는 건지, 아님 남의 시선 따위엔 도통 무관심한 건지. 여자도 분명 호감을 갖고 만나고 있는 남자였지만 도통 어떤 캐릭터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심지어 그 남자는 여자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던 그 순간에도 회색 추리닝을 입고 나타났다. 바야흐로 신촌의 한 허름한 카페에서 둘이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그 남자가 중국으로 지도 교수님 학회 참석차 따라갔다가 귀국하고 하루가 지난날이기도 했다. 그전까지 둘의 관계는 계속 애매모호했다. 남자가 딱히 고백을 한 것도 아닌 채 아주 가끔 신촌에서 이런저런 핑계로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사이였다.


여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남자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고, 만났을 때 입과 배가 아플 정도로 신나게 웃으며 좋은 시간을 보낸 것만은 확실했다. 남자는 세련되지도 도시적이지도 못했지만(서울 토박이였음에도) 천재적인 해박함과 예상을 뛰어넘는 유머감각이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자신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그에게 끌린 것인지, 아님 진짜 그 사람이 좋은 것인지 좀처럼 판단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남자로부터 신촌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뭔가 섬광처럼 예감 하나가 스쳤다.


'이 사람, 오늘 고백하려나보다.'


그렇게 예상을 하고 여자는 한껏 멋을 부리고 나갔다. 원래도 남의 시선에 자유롭지 못했고, 여대를 다니고 있었기에 여자는 옷차림과 화장에는 늘 최선을 다했지만 그날은 정말 온 힘을 주고 나갔다. 그런데 그 사람은 또 회색 추리닝을 입고 등장한 것이다. 과연 저 바지를 빨기는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스쳤다.


'설마, 저러고 고백을 하진 않겠지?'


후미진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더니 그는 음료를 시켰다. 곧바로 음료가 나왔다. 음료를 한번 빨아먹고는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러고는 볼일을 보러 나갔다. 그는 금방 돌아와서는 또 음료를 한 번 빨고서는 "나, 잠시..." 하고는 또 화장실로 사라졌다.


다시 돌아왔을 때 그 회색 추리닝에는 세 살 배기 남자아이들이 흔히 화장실에 갔다가 손을 씻고 젖은 손을 바지에 대충 닦은 후 만들어지는 모양새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사타구니 주변으로 물기가 듬성듬성 묻어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진짜 손을 닦은 후 어쩌다 묻은 물인지, 소변을 잘못 누어서 묻은 것인지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몇 번을 더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오빠,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아... 어. 중국 갔다 와서 몸살 기운이 있어서 계속 물을 마시고 왔거든. 또 목이 말라서 이걸 마시니깐 화장실에 계속 가고 싶네... 미안해, 화장실 너무 자주 가지?"


"몸이 아프면 집에서 쉬지, 왜 보자고 했어요? 우리 얼른 가요.."


"아, 줄게 있어서..."


"뭔데요?"


그는 그 회색 츄리닝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그 주머니 주변에도 물기가 듬성듬성 번져 있었다.


작은 네모 박스. 보통 주얼리를 포장할 때 쓰는 그 작은 선물 상자였다.


'설마, 반지는 아니겠지?'

여자는 제발 반지는 아니길 바라면서 기대하는 척 미소를 지으며 선물을 받았다.


"이게 뭐예요?"


"아, 중국 갔을 때 생각나서 샀어."


"지금 열어봐도 돼요?"


"어, 그럼. 열어봐.."


앗, 세상에. 진짜 반지였다. 왜 이 타이밍에 반지를?!


"오빠 웬 반지예요?"


"어어.... 그냥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리고... 좋아해.."


"하하하, 오빠 지금 고백하는 거죠? 좋아한다는 고백을 무슨 반지를 주면서 해요? 프러포즈도 아니고! 저 너무 부담스러운데..." (사실 여자는 반지가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냥 마음에 안 들었을 뿐)


"아, 원래 고백할 때 반지 주면 안 되는 건가? 그냥 선물해주고 싶은데 막상 뭘 줘야 할지 몰라서..."


"네 고마워요. 근데 제가 이거 받으면 오빠 고백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되는 거죠?"


"어어... 그렇지.. 받아줄... 거지? 앗 나 잠시 화장실 좀.."

또 사라졌다. 거참, 타이밍이 매번 기가 막혔다.


회색 추리닝에 또 잔뜩 물기를 머금고 나타난 그를 보면서 여자는 여전히 확신이 안 섰다. 그토록 싫은 저 회색 추리닝을 입은 남자를 거절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왜 그런 모진 마음은 안 드는 건지. 결국 여자는 일단 반지는 받기로 했다. 차마 아픈 몸을 끌고 반지를 전해 주겠다고 온 남자에게 다시 반지를 돌려줄 야속한 사람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여자는 몇 달 후 그 반지를 목욕탕에서 잃어버렸다. 그 남자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반지를 잃어버린 아쉬움은 크지 않았다. 반지는 없어졌지만 여자는 그 후로도 남자와 3년을 더 연애를 했다. 연애하는 내내 남자를 애달프게 하면서 못되게 굴기도 했지만 결국 둘은 남자가 만으로 채 서른이 되기 전에 결혼식까지 올렸다.


결혼을 하고 여자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그 징글징글한 회색 추리닝을 버리는 일이었다.


지금도 남자는 회색 추리닝을 입고 외출은 절대 금기 사항이다.


여전히 본인 꾸미는 데는 전혀 관심 없고, 남의 시선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 사람이지만 그 어눌한 시선이 늘 여자에게만은 고정되어 있다. 그렇게 벌써 둘은 12년을 함께 살면서 두 딸까지 키우고 있으니 앞으로도 회색 추리닝만 아니면 큰일 날 일은 없겠지?


-결혼기념일 12주년을 자축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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