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하다가 생긴 일
장맛비가 오랫동안 내리고 있지만 내겐 그리 거추장스럽지 않다.
나의 게으름과 나태함을 합리화시켜주는 비가 오히려 편안하다.
비가 오면 좀 더 누워있어도 되고, 누가 부산 떨며 불러내는 일도 적고
저마다 활기차게 다니며 즐거워하는 바깥소리도 이런 날씨에는 뜸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다가 머리를 세게 한 대 맞는 정도의, 아니 죽고 사는 정도의 일을 겪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들어 태생적인 게으름은 어느새 달아나고 새로운 에너지로 충만하여 개과천선하는 것이다.
출장을 다녀와서 직장 동료들과 단합회를 하기로 했다.
약속 장소로 가는 길, 낯선 길을 헤집고 나와 차도로 접어들었다. 왼쪽에 차가 오지 않음을 확인하고 우회전을 하여 가는데, 순간 내 차 옆으로 자그만 아이 둘이 뛰어오다 놀라 멈칫하는 것을 스쳐 지나가면서 보았다. 정말 순간적이었다. 지나오면서 나는 내 가슴을 쓸었다. 많이 놀랐다. 하마터면 아이들을 치일뻔했단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휴~한 숨을 돌리고 유턴을 했다. 그렇게 아무 일이 없었다면 내겐 별일 없는,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이 되었을 거다.
신호를 받고 앞으로 가는데 저 멀리서 엄청나게 커 보이는 아주머니와 아이 한 명이 손을 잡고 내 차가 있는 쪽으로 돌진해 오고 있는 거였다.
신호가 바뀌고, 띄엄띄엄 차들이 달려오고 있는 차도의 한 복판으로 오로지 내 차만 노려보고 힘차게 다가오는 그녀가 바위처럼 무섭고 거대해 보였다.
순간, 조금 전 내가 치일 뻔했던 그 아이의 엄마라는 생각을 하였고, 내게 어떤 예기치 않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동시에 들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것이 평소에는 아주 하잘 것 없는 일에도 상처받고,
"새가슴이다, 심장 약하다" 소리를 해 가며 놀라고 자기 방어하기에 급급할 만큼 쪼잔해지다가도
오히려 급박한 상황에서 침착해지고 대범해지고 냉정해질 때가 있다.
자존심 때문에 나의 온몸을 다해 나를 누르고 서 있는, 서 있어야 하는 그 묵직함으로.
나는 차도 한가운데 차를 세우고 그녀가 마지막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그녀를 못 본 척하고 그냥 지나가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건 나에 대한 모욕이고 그녀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아니었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를 온전하게 지키는 방법으로 줄행랑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기에, 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는 찜찜한 일이기에 나는 내 방법을 선택했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유리문을 내리고 그녀를 만났다.
"아니, 아줌마! 아이 지나가는 것 못 봤어요? 그렇게 지나가면 어떻게 해요?
만약 아이가 다쳤으면 어떻게 할 뻔했냐고요? 예? 정말 얼마나 놀랬는지 알아요?"
나는 그 정도로 나오는 게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다짜고짜 문 열고 멱살 잡을 수도 있는 게 모성애 아닌가?
"아주머니! 정말 미안합니다. 아이를 못 보았어요. 정말 미안합니다. 저도 얼마나 놀랬는지 몰라요.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사과를 했다.
그 아주머니만 보고 진심을 다해 내 실수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그녀는 얼마나 놀라고 분한 마음이었을까? 나에게 퍼부으면서 조금이라도 그 마음이 가실 수 있다면 기꺼이 맞아야 한다 생각했다.
아주머니는 몇 마디를 더 뭐라 하고는 아이의 손을 잡고 그냥 돌아갔다.
자기 분함을 다 받아주고 인정한 내 태도에서 누그러진 것인지,
나의 인간적 실수에 대한 인정이었는지,
원래 순한 사람인지 그건 모르겠지만 그 정도에서 사건은 끝이 났다.
욕먹고, 아무렇지도 않게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내가 참 힘들었다.
끔찍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는데 다행스럽게 작은 해프닝으로 지나가다니 정말 운이 좋았단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에게 정말 미안하단 말을 주절이, 절실히 하고 산 적이 별로 없다.
나는 두근거리고 울렁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상황을 보고했다.
위로를 받고 싶어서. 아니 나의 실수에 대한 쪽팔림을 내 안에 숨기고 있는 게 더 힘들어서 다 내어 놓고 싶었다. 정말 위로받고 싶었다. 친구는 시원하게 나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었다.
정말 운이 좋은 거였다고. 너 잘 한 행동이라고...
전화를 끊고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마음의 짐이 좀 내려지는 것 같았다. 내 속에 있던 부끄러움도 다스려졌다. 머리도 한결 맑아졌다.
오랜 나태와 변화 없음에 대한 나 자신에게 '정신 차려!"하고 누군가 외치는 듯한 사건 속에서 새로운 긴장이 느껴지고 그래서 이어지는 내 삶에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 참 희한한 경험이다.
그리고 하루를 다 보내고 난 지금 이 순간의 평온과 휴식은
내게 누군가가 보내 준 선물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소중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내 삶을 대충대충 살 수 있겠는가?
정말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