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음주와 외로움

by 귀여운영웅

결혼 전 혼자 살 때 있었던 일이다.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고 지내던 친구로부터 간만에 연락이 왔다. 술을 마시고 내 생각이 나서 연락을 했다고 한다. '술을 마시니까 유독 네 생각이 나. 꼭 너여야만 해.' 뭐 이 정도까지의 나에 대한 특별한 감정은 당연히 아닌 것 같고,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그 누구라도 본인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는 대략 그런 마음인 것 같다. 아마도 여러 전화통화 시도 중 어쩌다 내가 얻어걸린 것일 뿐이다. 경험자로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아주 오래전이긴 해도 한때 나도 외롭고 힘들 때 연락처 목록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 번씩 다 전화를 걸었다.


그런 내 행동에 '네가 힘든데 나더러 어쩌라고' 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며 굉장히 차갑게 구는 친구가 있었고, 반대로 외면하지 않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친구가 있었다. 전자의 경우, 저런 일이 있고 나니 더 이상 연락을 하기가 꺼려졌다. 힘들 때 남에게 의지하려고 했던 나도 잘못하긴 했지. 후자의 경우, 평소 술을 좋아하고 불안정한 인생을 사는 친구였는데 아마도 자신의 경험에 의한 공감이 발휘되어 차마 외면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그 친구가 내 힘듦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 위로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던 것 같다.


예전에는 공감과 위로는 문제해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생각해 보면, 타인의 감정과 상황에 진심으로 공감해 주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고, 위로에는 꽤 큰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해주려는 사람을 만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 것 같다. 그 쉽지 않은 일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어차피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고, 애초에 남에게서 문제해결을 바라는 게 잘못됐다.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 어쨌든 공감과 위로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나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휴대폰 너머의 술에 잔뜩 취한 친구가 내게 '너는 외로움을 안 타는 것 같아' 라고 말했다. 생각해 보니 저 말은 과거에 다른 친구에게서도 똑같이 들은 얘기다. 외롭다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 즉 호르몬 작용에 불과할 텐데, 그러니까 그걸 느끼는 건 본인 뿐일 텐데, 겉보기에 외로워 보이는 건 뭐고 또 외로워 보이지 않는 건 뭘까. 누군가를 보고 외롭다고 느낄 때, 그 느낌은 아마도 타인에게 나 자신을 투영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본인이 저 상황이라면 외로울 것이고, 본인이 외로울 때 저런 행동을 할 것이라는 지레짐작에 의해서 상대방의 외로움을 상상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친구의 눈에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는 건, 내가 처한 상황과 그에 따른 행동이 자기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기 때문은 아닐까.


너는 외로움을 안 타는 것 같아. 아 그렇구나. 이 친구가 지금 외롭구나. 외로워서 미칠 것 같구나. ‘나는 이렇게나 외로운데, 네 상황을 생각해 보면 너도 분명 외로울 것 같은데, 아니 반드시 외로워야 할 텐데, 그런데 너는 왜 외로움을 호소하지 않고, 왜 그렇게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거니.’ 저 말에 대략 이런 내용이 들어있음을 나 혼자 상상해서 덧붙여본다. 누군가의 눈에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굳이 해석하자니 이런 상상이 더해진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왜 내가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건지.


그 통화가 있고 얼마 뒤, 어쩌다 보니 과음을 했다. 마실 때는 신나서 벌컥벌컥 마셔놓고는 시간이 지나니 오한, 메스꺼움, 구역질 따위로 몸이 불편해지면서 기분이 급격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앞으로 술을 마시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로웠다. 특히 술이 깰 때 굉장히 고통스러운데 이때는 몸도 몸이지만 몸보다는 오히려 정신이 더 괴롭다. 술기운에 들뜬 기분이 싹 가시고 나면 뭔가 알 수 없는 허망함이 느껴진다.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섣불리 잠이 오지 않았다. 지금 나는 숙취로 괴롭다. 내 옆에는 아무도 없다, 자고 일어나면 내일 또 출근을 해야 한다. 괴롭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 괴롭지. 이게 이렇게까지 괴로울 일인가. 지금 생각해 보면 저 괴로움은 아무래도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술을 마시고 내게 전화를 걸었던 친구가 떠오른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삶을 버티지 못하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들에게서 나 자신을 투영해 본다.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외로운 사람들이다.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던 과거를 돌이켜보면 분명 나는 외로웠던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임산부이기도 하고, 어쨌든 술을 마시지 않은지 오래됐다. 돌이켜보면 비록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술만큼 싸고 빠르게 감정을 환기시켜 주는 게 잘 없다. 오랜만에 술을 마시고 싶다. 임산부는 도대체 무엇으로 이 외로움을 해소해야 할지 모르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2. 기억과 추억, 과거와의 거리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