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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 Sep 27. 2023

허주희의 人 인터뷰 20. 한복 연구가 박술녀

‘한복’ 외길 걸어오다

‘스타’는 동경의 대상이다. 

스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대중들은 울고 웃는다. 말 그대로 밤하늘에 빛나는 별 같은 존재가 ‘스타’다. 수많은 스타들의 한복을 담당하며, 스타를 빛내는 또 다른 스타, ‘한복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가진 이. 바로 한복 연구가 박술녀다. 근 40년간 오로지 우리 옷 ‘한복’을 지으면서 묵묵히 외길을 걸어온 박술녀 선생을 만났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박술녀한복집’으로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전화를 받은 이는 놀랍게도 박술녀 선생이었다. 특유한 칼칼한 목소리에는 당당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제가 직접 매장 전화를 받으면 사람들이 적잖이 놀라더라고요. 제 이름으로 한복집을 운영하는 만큼 전화는 물론 항상 매장에서 손님을 직접 맞이합니다. 제 이름을 보고 한복을 찾아주시는 분들에 대한 작은 배려이자 책임감이라 생각합니다.”


한복 인생 어언 40년. 

박술녀 선생은 그동안 수차례 한복 패션쇼를 열었고 사극, 현대극 가리지 않고 각종 드라마와 방송 프로그램에 한복을 협찬하고 수많은 연예인들에게 한복을 지어주면서 한복 전도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는 이영희, 이리자 등 국내 1세대 한복연구가를 잇는 대표적인 한복연구가로 현재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스타들이 먼저 찾는 박술녀 한복, ‘한복 대통령’ 칭호 얻어


박술녀 한복은 연예인들이 가장 입고 싶은 한복이자, 스타들이 찾는 한복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우리 한복의 아름다운 멋을 알리면서 누구보다 한복의 대중화에 기여했다고 자부한다. 그의 이름 박술녀에는 반드시 ‘한복’이 따라붙는다. 또 한복하면, 박술녀라는 이름이 떠오를 정도니 그에게 ‘한복’은 인생 그 자체다.


“스타는 떴다가 지고, 어느 순간 왔다가 가지만 한복을 만드는 우리는 그대로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성공했냐고 묻는데 특별한 비결이나 노하우가 있는 게 아니라 정말 한 길만 파고 들며 피 땀 흘려 일 한 것뿐입니다. 땀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 일을 시작한 이후 40년 동안 제 인생의 모든 것은 한복입니다.”


갓 난 아기가 마흔 살 중년이 되는 긴 세월, 그는 오로지 ‘한복’ 하나에만 온 정신과 열정을 쏟았다. 그의 눈은, 바라보는 대상이 무엇이든 작은 티끌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예리하게 빛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은 매서운 관찰력에 포위된다. 그 관찰력은 한 순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체득한 지혜의 산물이다.



사물 하나를 볼 때도 내면까지 꿰뚫을 듯 유심히 관찰


박술녀는 늘 바느질을 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어머니의 섬세한 손재주와 성향을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하나의 사물을 보더라도 겉모습만 보는 게 아니라 온전히 몰입하여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성향을 닮은 저도 자연스럽게 어떤 사물의 좋은 점과 나쁜 점, 그 내면까지 꿰뚫을 듯 유심히 관찰하곤 하였습니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 진지한 관찰과 통찰력을 키운 것이죠. 예를 들어 낯선 곳에서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더라도 저는 시간만 보는 게 아니라 시계 위에 달린 액세서리까지 관찰합니다. 자라면서 옷을 좋아하다보니 이 옷은 어떻게 디자인되고 만들어졌을까 깊이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한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한 가지 일에 몰입하기 때문에 주변의 다른 것은 보일 리가 없지요. 오로지 한 가지만 단순하게 파고드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빠져든 유일한 것이 바로 한복입니다.”


어릴 때 어머니에게 바느질을 배웠던 박술녀는 옷을 깁고 짓는 일에 완전히 몰입하면서 밤을 새기 일쑤였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즐거움이 컸기에 피곤한 줄도 몰랐다. 집안 형편상 방직공장에서 일했던 그는 26세에 상경해 이리자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한복을 배우기 시작했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한복이었기에 남들보다 몇 배 더 일했다. 5년 만에 독립해 서울 군자동에 작은 한복집을 열었고 10여 년 뒤, 10배 넘는 규모로 청담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5년 4층 규모의 청담동 사옥으로 옮긴 ‘박술녀한복’은 한복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잠을 자다가 깨어나도 오로지 한복’ 생각


잠을 자다가 순간 깨어나도 오로지 그의 머리에는 ‘한복’이 자리하고 있다.


“새벽별을 보고 출근하고 밤하늘의 별을 보고 퇴근하며 제가 깨어있는 시간은 온통 한복 생각밖에 없습니다. 아니, 잠을 자다가 깨어나는 순간에도 ‘한복’만 생각합니다.”


근 40년 간 ‘한복 인생’을 살아오면서 박술녀는 한복의 위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 매장은 한복을 대여하지 않고 컨설팅도 하지 않고 오로지 고객의 주문에 맞춰 한복을 짓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수입품이나 명품은 귀하게 여기면서 정작 우리 전통 옷 한복에는 관심조차 없고 등한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복만 고집해 왔기에 사실 어려운 고비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힘든 상황이지만 이제까지 해왔듯이 희망을 갖고 계속 이 일을 이어나가야죠. 저도 나이가 들면서 몸이 점점 힘들지만, 건강을 유지하면서 질 좋은 한복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 전통 의상 한복을 소중히 지켜나가는 것은 결국 우리의 몫이다. 한복을 처음 배웠던 40년 전의 초심을 잊지 않고, 오늘도 한복과 동고동락하는 박술녀 선생. 

오늘도 분주히 움직이는 그의 손길이, 곱고 아름다운 한복의 자태와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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