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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슬 스커트 Apr 02. 2021

어떤 선배가 존경스러운가요?

좌절했을 때 극복해나가는 모습의 차이.

자발적 임포자도 아닌 파이어족도 아닌 당신

최근 2030 세대 사이에서 임원이 되기를 희망하기보다 재테크에 시간을 쓰는 "자발적 임포자"가 많다는 기사를 읽었다. 최근에도 "만년 부장, 만년 팀장" 이런 용어들이 조직에서 승진 못하는 인력을 부정적으로 부르는 말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또 그에 따라 길어진 은퇴 후를 대비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회사에서의 승진과 은퇴의 양상도 달라지고 있다. 


내가 실무자급으로 일하던 10년 전만 해도 팀장이었다가 조직개편에서 밀려나 팀원이 되면 어김없이 짐을 싸서 회사를 떠나야 했다. 그러한 조직개편은 회사에서 합법적인 "해고"로 받아들여졌고, 정규직 신분으로 반드시 퇴사라는 의사결정을 하지 않아도 됨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굴욕과 조직 내에서의 사망선고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에 있었다. 

그 당시엔 회사=나라는 일체감과 로열티가 지금보다 훨씬 컸었고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조직에서의 관계 설정이나 위치가 너무나도 중요했기 때문에, [팀장 보직 해지=퇴사 요청]의 등식이 성립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조직에서의 보직 해지 발령에 대응하는 구성원들의 반응은 많이 달라졌다. 왜냐하면 그냥 '버티는 것'이 더 남는 장사일 수 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은퇴를 은밀하게 압박받는 나이는 점점 어려지고 있다. 40대 중반만 되어도 누구나 '잠재적인 은퇴 대상자' 리스트에 포함된다. 그렇지만 40대 은퇴 이후 살아갈 날은 살아온 날만큼 남아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빠른 은퇴 이후 인생 제2막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조직이 팀장이었던 나를 팀원으로 내리더라도 이전처럼 쉽게 사표 던지고 떠나기엔 남은 내 인생의 날들이 너무 길고 미래는 너무 막연하다. 


이렇게 조직에는 자발적 임포 자도 아닌, 파이어족도 아닌, 재정적 안정감을 주는 마지막 보루인 직장에서의 수명을 좀 더 연장시키며 끝까지  버티려는 40-50대의 직장인이 늘어나면서 조직 구성원의 나이와 경력에 따른 피라미드 구조는 점점 역피라미드화 되어가고 있다. 


내가 귀동냥으로만 들어봤던 IMF 이전 90년대 직장에서는 과장급만 되어도 하루 종일 신문 보면서 손하나 까딱 안 하고 편하게 회사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지금 그때의 과장보다 더 늙어버렸지만 여전히 실무 전전에서 뛰어야 하는 이 시대의 차 부장들은 어떻게 회사 생활을 해야 할까? 


두 선배님을 비교해보려고 한다.


1. 어떤 자리에서든 쓰임이 있었던 아버지뻘 선배님


한 사람은 10년 전쯤 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선배님이다.

한참 전에 그는 팀장 직책에서 내려왔고, 꽤 오랫동안 팀원으로서 우리 옆에 머물렀다.

그에게는 몇 가지 확실한 특징이 있었다. 


1)  나이는 아버지 뻘이다.  

2)  인맥이 몹시 넓어서 컨택 포인트를 찾아줄 때 유용한 조력자이다. 

3)  비즈니스 일본어를 회사에서 제일 잘한다.

4)  몹시 행동지향적이고 실무에 능하다. 


요즘 회사에서는 나이 많고 경력 많이 쌓았다고 무조건 팀장을 시켜주지는 않는다.

팀장으로 가장 잘 팔리는 어떤 연령대의 변곡점을 지나면 아무리 경력이 좋고 노련한 인력이라도 쉽사리 다시 팀장으로 기용되지는 않는다.


그에게 그 변곡점은 30대 이른 나이에 이미 와버렸고, 이후 그는 70년생 팀장을 모시는 60년생 팀원으로 오래오래 조직생활을 했다. 잘 나가던 30대 그에게 교통사고처럼 갑자기 와버렸던 그 시련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조직 생활의 태도를 팀장에서 팀원으로 철저하게 바꾸었다. 

쓰임이 주어질 때 최대한 역량을 발휘했으며, 쉬어야 할 때는 여유롭게 지냈다.

사실 리더의 역할을 못하게 되었지만 실행할 줄 알고 일본어에 강했던 그 선배는 받쳐주는 후배 사원이 없이 홀로 있어도 실무를 척척 해결해내며 본인에게 주어진 업무를 곧 잘 해냈다.


"회사가 좀 쉬라는데 뭘 그런 걸 고민해?"


프로젝트 중간에 잠시 일이 없었을 때 안절부절못하는 내게 그 선배가 했던 조언이었다.


그는 결국 회사에서 30년 근속을 채웠으며 많은 후배의 존경을 받으며 성대한 퇴사 기념 파티로 조직생활을 마감했다.



2. 다시 팀장 자리 탈환만을 꿈꾸면서 맴돌던 40대 후반의 선배님


다른 사람은 팀장 보직 해임으로 멘붕이 되었던, 꽤 최근에 함께 했던 선배다.


그는 기본적으로 인간관계가 좋고 사람들의 말을 잘 듣고 또 얘기하기를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었다



1)  팀장 포지션에 10년 이상, 40대 중반 이상까지 있었다.

2)  회사에서 가장 인맥이 넓고 네트워크가 좋았다.

3)  자존심이 강하고 인정 욕구가 강했다. 

4) 윗분을 극진히 모셨다. 


보직 해임이 된 이후부터 그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보직해임 후에 힘든 시기는 반드시 온다.

보직 해임된 당일 그 이튿날 가장 힘든 것이 아니라 이 정신적인 충격은 팀원으로 일을 해나가면서 순간순간 찾아온다. 어떻게 슬기롭게 이 멘붕의 시간들을 다스려나갈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다. 


내게 잘해주었고 정치적이라기보다 업무 지향적이었던 선배였기에 자주 마음이 쓰여 나는 그의 하루하루를 자주 살폈다.


그 선배는 본인보다 처지가 딱한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아마 그런 사람들과 비교를 통해서 본인을 좀 추스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한 동안, 아주 오랫동안 실무 업무를 맡지 않았는데.. 다음번 조직개편에서 팀장으로 다시 재기용될 기회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 선배는 실무를 너무 오랫동안 손 놔서 다시 하기 어렵다고 했고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결단을 내려야 한다며 1년 이상 어정쩡한 상태로 계속 실무를 하지 않는 팀원으로 남아 있었다.


일 년이 훌쩍 넘게 그는 과거의 본인을 놓지 못하고 있었고 그 자리에 박제처럼 머물러버렸으며, 결국 자신의 처지를 달래주는 가족 얘기며 개인적인 얘기들로 후배들과의 커피 타임을 채워나갔다.


일로 만난 사이, 후배들이 존경하는 선배의 모습이란?


좋아하고 존경했던 선배의 방황이 길어지면서 점점 그는 고립되어 갔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당장의 실무가 발등에 불처럼 떨어진 후배들에게 그는 어떤 도움이 되는 업무적인 조언이나 지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교 동문도 아니고, 동네 선후배 사이도 아니다.

직장이라는 일터에서 일로 만난 사이이다.


그렇기에 그 선배의 마지막 모습은 더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후배들이 존경하는 직장 선배의 모습이란, 팀장 시절을 아쉬워하며 손 하나라도 아쉬운 후배들 앞에서 뒷짐 지고 서서 개인사를 늘어놓는 모습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위치에서든 본인의 몫을 해내려 노력하고 비록 연기일지언정 직장인으로서의 업무 고민을 함께 해주고, 쓰린 속을 남몰래 달래다 어느 날 못 참고 사표를 던질지언정 늘 담담하고 흔들림 없는 모습을 존경하고 좋아한다.  하다못해 업무적으로 도움을 줄 수 없으면 적어도 민폐는 끼치지 않아야 한다.


내가 라테 세대라 그런지 몰라도 직장에서는 직장인으로서의 본분을 지키고 일에 대한 본인의 경험을 열정으로 풀어내는 사람을 볼 때 믿음도 가고 좋아 보인다.



계급장을 떼면 실무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나를 포함하여 조직에서의 성취가 좌절된 많은 선배들을 보았다.

요즘엔 밀려났다고 해서 호기롭게 사표를 똭 던지고 나올 정도로 노후 준비가 완벽한 사람도 별로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계급장이 떨어졌을 때 생존할 수 있는 전략"이 있어야 한다.


계급장을 떼면 보이는 것은 직장인 OOO인 것이다.

직장인 '나'는 사원 급부터 부장급에 이르기까지 내 직급 이하의 모든 일은 커버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직급에 맞는 일을 회사가 주겠지만, 요즘 보니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역 피라미드 현상은 점점 심해져서 고위급 간부들이 사원, 대리들만큼 머릿수가 많아지고 있다.


회사는 이런 때 고위급 간부인 나에게 부하직원을 붙여주지 않고 실무의 A부터 Z까지 맡길 수도 있다. 

계급장 떨어진 평사원이라면 무엇이든 다시 손에 흙 묻힐 생각하고 임해야 한다.


그간 쌓아온 경험치가 있는데, 당연 후배들보다는 노련하게, 그리고 더 넓은 시야로 무슨 일이든 잘 해낼 수 있다. 이렇게 나의 실무자로서 그간 쌓아온 내공을 보여준 다음에야 비로소 선배로서 인정받고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다. 


과거의 영광에 머물러 있지 말자.

그 '과거의 영광'을 요새 한마디로 라테라고 하지 않는가.

라테에 머무르는 선배가 아니라 오늘도 후배들 앞에서 업무로서 보여주고 태도로서 귀감이 될 수 있는 한 아름다운 인간이 되자.


내가 회사에서 누군가가 가장 섹시하고 아름다워 보일 때는, 멋있어 보일 때는, 

일에 몰입해서 스마트하게 해낼 때인 것 같다.  


조직을 원망하며 한탄의 세월만 보내면서 월급 루팡 한 이후, 내가 회사를 그만두게 되거나 혹은 이직을 하게 되거나 그 조직에 계속 머무른다고 해도.. 그런 경험들이 내게 훈장 같을까?

그저 그냥 빨리 잊어졌으면 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우리의 시간은 그러기에는 너무나 소중하다.


사랑하는 일을 이왕 놓쳐버렸고, 직장인으로서 변화해야 할 타이밍마저도 놓쳤지만 기억하자.

당신은 여전히 번듯한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OOO 부장님이다. 


창업과 이직을 준비하더라도 너무 빈틈을 보여주지는 말자.

그게 선배들이 지켜야 할 마지막 자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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