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일기] 플라스틱 레일과 유령 행사 가격표

by 편알못가이드

달력의 마지막 날. 사람들은 편의점 진열대의 '1+1'이나 '2+1' 가격표가 밤사이 우렁각시나 정교한 중앙 시스템에 의해 자동으로 뒤바뀐다고 믿는 눈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롯이 점주와 알바생의 거칠어진 손끝이 빚어내는 아날로그적 고역의 결과물이다.


올해도 벌써 두 번째 월말이 찾아왔다. 세븐일레븐 시절에는 그것을 '행사 태그'라 불렀고, 지금 몸담은 진영에서는 '쇼카드'라 부른다. 이름이야 어찌 됐든 이 작은 종이 쪼가리들이 안겨주는 스트레스의 질량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징그럽도록 똑같다.


아니, 어쩌면 더 고약해졌다. 예전에는 한 달에 단 하루만 고생하면 끝나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하지만 지금은 3일짜리 반짝 행사, 1주일짜리, 2주짜리, 그리고 한 달 내내 이어지는 행사가 뒤죽박죽 섞여서 마치 프리 재즈의 엇박자처럼 돌아간다. 우리는 수백 개의 쇼카드 더미에서 우리 점포에 존재하는 상품의 것만을 핀셋으로 집어내듯 골라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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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열대 앞으로 다가가 빳빳한 새 쇼카드를 끼워 넣는 일은 묘한 신경전을 동반한다. 굳게 다문 플라스틱 가격표 레일이 한 번에 입을 벌려주지 않으면, 결국 생손톱을 밀어 넣어 틈을 벌려야만 한다. 플라스틱과 손톱이 마찰하는 감각. 그것은 아주, 정말 아주 고약한 감각이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이 허술한 수작업 시스템은 여지없이 오류를 뿜어낸다. 교차 증정이 안 되는 상품이거나 행사 기간이 하루 지난 것을 미처 빼내지 못했을 때, 고객의 클레임은 날카롭게 날아든다. 그럴 때면 나는 "제가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라며 진열대로 다가가, "아, 이건 미세하게 용량이 다른 상품이네요"라거나 "이 행사는 어제부로 종료되었습니다"라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아야 한다.


가장 황당한 것은 차원 이동이라도 한 듯 불쑥 튀어나오는 과거의 유령들이다. 분명 꼼꼼히 제거했다고 믿었는데, 3월의 봄맞이 쇼카드를 끼워 넣다 보면 진열대 구석에서 작년 12월의 크리스마스 쇼카드가 툭 떨어지는 식이다. 도대체 어느 평행우주의 틈새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것일까.


유리벽을 장식하는 포스터 도배 작업도 만만치 않다. 이달의 중점 행사, 신용카드 혜택, 포인트 적립 안내 같은 쓸데없는 정보가 잔뜩 인쇄된 거대한 종이들. 요즘 사람들은 전부 스마트폰 앱을 들여다보지, 80년대 대학가 대자보 읽듯 편의점 유리창 앞에 서서 혜택을 정독하지 않는다. 온라인 세상에서는 몇 번의 클릭과 시나리오 연결만으로 복잡한 포스팅이나 데이터가 알아서 굴러가도록 세팅하는 시대가 아닌가. AI가 '딸깍' 한 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이 첨단의 시대에, 편의점의 밤은 여전히 20년 전의 육체노동에 머물러 있다. 전자가격표 같은 영리한 시스템이 도입되어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우리를 구원해 줄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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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 끝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낡은 쇼카드를 빼내다가, 문득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이만큼의 손놀림조차 거저먹으려 드는 나의 이 마음은, 결국 도둑놈 심보인 걸까. 어쩌면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자동화된 시스템에 떠넘기고, 손끝으로 만져지는 삶의 잔잔한 마찰력마저 '딸깍' 한 번으로 증발시키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다시 빳빳한 종이표를 집어 들고 플라스틱 레일 틈새로 손톱을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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