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배달 주문이 도착했습니다!"
매장 안의 고요한 공기를 찢고 경쾌한 기계음이 허공에 울려 퍼진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 그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마치 평행우주 어딘가에서 날아온 외계의 신호처럼 기묘하게 들린다.
20년 전의 편의점과 지금의 편의점을 가르는 가장 거대하고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손님들'의 존재다. 옛날 사람들에게 편의점이란 무조건 집 앞 3분 거리에 존재하는, 낡은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가면 닿을 수 있는 물리적인 안식처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사람들은 편의점과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 살면서도,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우리 가게의 형광등 불빛을 곁눈질하며 스마트폰으로 배달을 시킨다. 이따금 나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들어온 주문을 볼 때면, 나는 굳이 배달 라이더를 부르지 않고 직접 비닐봉지를 들고 밤의 산책을 나서기도 한다. 그것은 이 완벽한 단절의 시대에 내가 부릴 수 있는 아주 작고 쓸쓸한 저항 같은 것이다.
만약 누군가 편의점이라는 공간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 날씨를 묻고 소소한 일상을 교환하는, 그 낡고 인간적인 풍경을 기대한다면 유감이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요즘의 편의점은 철저히 무균실처럼 운영된다. 사람들은 어플에서 한정판 상품을 사전 예약하고, 매장에 들어와 말없이 바코드만 내민 뒤 물건을 낚아채듯 사라진다. 혹은 침대에 누워 배달 어플로 쇼핑을 하고, 문 앞에 조용히 놓인 비닐봉지를 집 안으로 들이기만 하면 된다. 눈맞춤도, 대화도 없다. 오로지 완벽하고 매끄러운 '단절'만이 존재할 뿐이다. 20년 전 처음 계산대 앞에 섰을 때, 나는 미래의 편의점이 이토록 조용해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POS기 옆에 수북하게 쌓여가는 배달 영수증의 산을 바라보며, 나는 현대인의 인간 소외에 대해 생각한다. 단골손님과 나누던 영양가 없는 농담도, 하원 길에 가게를 참새 방앗간처럼 들르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서서히 증발해버렸다. 팍팍한 태블릿의 기계음이 울리면, 나는 묵묵히 진열대 사이를 오가며 비닐봉지에 물건을 주섬주섬 담는다. 그 일련의 기계적인 노동 속에서 마음 한구석으로 서늘한 외로움이 스며드는 것은 어쩌면 아주 자연스러운 물리 법칙일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의 숫자는 이 단절을 열렬히 환영한다. 영수증이 쌓일수록 매출은 정직하게 우상향한다. 어떤 날은 이 '얼굴 없는 손님'들이 올려주는 배달 매출이 전체의 30%를 훌쩍 넘기기도 한다. 플랫폼에 떼어주는 수수료를 제하고서라도 나의 생계를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배달 어플 특유의 최소 주문 금액 덕분에, 한 사람이 결제하는 '객단가'는 오프라인 손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다. 통장 잔고를 생각하면 마땅히 싱글벙글 웃어야 할 상황임에도, 나는 카운터 건너편에 서 있던 사람의 체온이 못내 그립다.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배달 전문 편의점'의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르겠다. AI가 나의 우울한 기분과 취향을 분석해 차가운 캔맥주와 적당히 짭짤한 스낵을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나는 그저 결제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 세상. 바야흐로 클릭 한 번으로 모든 것이 10분 만에 문 앞에 당도하는 '대(大)딸깍시대'의 완성이다.
하지만 내가 24시간 환하게 형광등을 켜놓고 이 유리 상자 안에서 졸음을 참아가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유는, 단지 훌륭한 물류 창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타인과 미세하게 연결되고 싶다는 이 구시대적인 갈망은, 어쩌면 20년 동안 같은 방식으로만 세상을 살아온 40대 아저씨의 처절한 부적응기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다시 울릴 기계음을 조용히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