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뺑뺑이, 그리고 혼자 먹는 편의점 도시락
(부제: 가장 풍요로운 도시에서 가장 외로운 아이들, 정서적 방임의 그늘)
"요즘 대치동 학원가에는 밤마다
캠핑카가 줄을 섭니다.
아이들이 학원 뺑뺑이 돌 때 잠시 눈 붙이고 공부하라고 부모님들이 대절해 놓은 거죠."
뉴스를 보며 저는 입안이 씁쓸해졌습니다. 캠핑카라니. 얼핏 보면 자식을 위한 부모의 극진한 희생과 사랑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아이들을 쉬지 않고 돌아가게 만드는,
기름칠 잘 된 기계 부품처럼 다루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많은 부모님은 아이에게 최고급 환경을 제공했다고 자부합니다.
남들은 못 해줘서 안달인 고액 과외와 라이딩 서비스까지 해주는데 무슨 문제가 있냐고 반문합니다.
하지만 정작 경찰서 조사실에서 마주하는 아이들의 눈빛은 텅 비어 있습니다.
오늘은 돈으로 채울 수 없는, 아이들의 '정서적 허기'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비행 청소년이라고 하면 가정 형편이 어렵거나 결손 가정의 아이들을 떠올립니다.
가난이 범죄를 만든다는 낡은 공식입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현장에서 만나는 아이들 중에는 부모님의 직업이 의사, 변호사, 대기업 임원인 경우가 수두룩합니다.
명품 패딩을 교복처럼 입고 다니는
소위 '있는 집 자식들'입니다.
그 아이들이 경찰서에 오는 이유는 배가 고파서 빵을 훔치는 생계형 절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자극적이고 위험한 성범죄(불법 촬영, 성매매)나 도박, 마약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전에 언급했던, 딸의 방에 녹음기를 설치해 성매매 현장을 직접 신고했던 어머니도 그랬습니다.
맞벌이 고소득 전문직 부부, 남부러울 것 없는 외동딸, 부족함 없는 용돈. 물질적으로는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왜 엇나갔을까요? 부모님이 회사 일로 바빠 비워둔 시간, 빡빡한 학원 스케줄로 지쳐버린 마음의 빈틈을 아이는 잘못된 쾌락으로 채우려 했던 것입니다.
"엄마는 내 성적표랑 학원 레벨에만 관심 있잖아요. '나'라는 사람한테는 관심 없잖아요."
아이에게 필요했던 건 백화점 신상 패딩이나
1타 강사의 수업이 아니라,
오늘 하루는 어땠냐고,
밥은 먹었냐고 물어봐 주는 따뜻한 저녁 식사
한 끼였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의 일탈은 "나 좀 봐달라"는 처절한 구조 신호입니다.
제가 지구대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새벽 2시,
주유소 주변을 서성이는 어린아이들이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초등학생, 중학생 두 형제가 우산도 없이 쫄딱 젖은 채 주유소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덜덜 떨고 있는 아이들의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습니다.
"너네 뭐야? 집 어디야? 이름 대."
함께 출동한 동료 경찰관의 다소 거친 말투에 아이들은 잔뜩 겁을 먹고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저는 직감했습니다.
이건 단순한 가출이 아니구나.
저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히고,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건넸습니다.
"비 많이 오는데 춥지 않아? 아저씨가 혼내려는 거 아니야. 따뜻한 데 데려다줄게. 무슨 일 있어?"
한참 만에 아이들이 털어놓은 사연은 충격적이었습니다.
형제는 심각한 학교폭력 피해자였습니다.
학교 선생님께 도움을 청해도 해결되지 않았고, 마지막 보루인 부모님조차
"그까짓 일로 유난 떨지 마라", "네가 약해 빠져서 당하는 거다"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입니다.
"집에 가기 싫어요. 학교도 지옥이고, 집도 지옥 같아요."
아이들에게는 폭력이 난무하는 학교보다,
내 편 하나 없는 차가운 집보다,
차라리 쏟아지는 빗속이 더 안전하게 느껴졌던 겁니다.
결국 저는 아이들을 달래 청소년 쉼터로 연계했습니다.
따뜻한 집을 두고 낯선 쉼터행을 택해야 했던 형제의 젖은 뒷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사고를 쳐서 경찰서에 오면 부모님께 연락을 드립니다.
그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반응은 아이가 집에서 어떤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경찰관님, 법대로 하세요. 저도 걔 포기했습니다. 알아서 하세요."
전화를 끊어버리는 부모님.
물론 자식이 속을 많이 썩여서 지치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3자인 경찰관도 당황스러운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는 아이의 마음은 오죽할까요.
"알아서 하라"는 말은 부모로서의 직무 유기이자, 아이에게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선고하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습니다.
부모가 포기한 자식을 세상 어느 누가 귀하게 여겨줄까요.
아이는 그 순간, "역시 나 같은 건 없어져야 해"라며 마음속의 마지막 끈을 놓아버립니다.
이것은 명백한 아동복지법상 '정서적 학대'입니다.
늦은 밤,
학원가 근처 편의점에 가보신 적 있나요?
교복을 입거나 학원 가방을 멘 아이들이 창가 자리에 일렬로 앉아 컵라면이나 삼각김밥을 먹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준 카드로 근처 식당에서 따뜻한 밥을 사 먹을 수도 있지만,
아이들은 굳이 그 좁고 불편한 편의점 구석을 찾습니다.
그리고 하나같이 귀에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꽂고 스마트폰만 들여다봅니다.
세상의 소리를 차단하겠다는 듯이 말입니다.
아마도 그곳이 학원 선생님의 감시도,
부모님의 기대 섞인 잔소리도 없는 유일한 해방구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혼자 먹는 인스턴트 음식보다, 가족과 함께 먹는 식탁이 더 불편해진 아이들.
그 고요한 혼밥 시간은 아이들이 세상과의 단절을 선택하는 슬픈 의식처럼 보입니다.
학원 뺑뺑이를 돌며 캠핑카에서 쪽잠을 자는 아이, 폭력을 피해 빗속으로 도망친 아이, 편의점에서 혼자 라면을 삼키는 아이.
겉모습은 다르지만,
이들의 내면은 똑같이 굶주려 있습니다.
'정서적 학대, 방임'은 때리지 않고 영혼을 서서히 말려 죽이는, 가장 조용하고 잔인한 학대입니다.
오늘 밤, 학원에서 늦게 돌아온 아이에게 습관처럼 "성적표 나왔니?", "숙제 다 했니?"라고 묻기 전에, 잠시 멈추고 아이의 눈을 봐주세요. 그리고 이렇게 물어봐 주세요.
"오늘 하루 많이 힘들었지? 밥은 챙겨 먹었어?"
"지금 네 마음은 좀 어때?"
아이들이 진짜 배고픈 것은 편의점 도시락이나 명품 패딩이 아닙니다.
바로 "나는 무조건 네 편이야"라는
부모님의 따뜻한 눈빛과 관심입니다.
그 짧은 한마디가, 빗속을 헤매는 아이를 집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유일한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