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기분이 나와 같기를

비밀; 사랑할 때 우리가 감추고 있는 속마음

by 박철우

당신의 기분이
나와 같기를


(잠깐 소설)

‘하얀 티셔츠 위로 떨어진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되고 싶었다.’

“정량보다 많이 드렸어요~”
점원의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파인트 용기가 올라간 저울은 336g을 가리키고 있었다. 320g이 정량인 것을 감안하면, 한사람도 지나치는 법 없는 점원의 저 영혼 없는 말도 참아줄만 했지만, 애초에 그녀는 저울에 찍힌 숫자를 믿지 않았다.

그녀는 집에 들어와 코트를 벗어던지고 화장실로 향했다. 코트가 쇼파에 닿은 순간과 발에서 신발이 벗겨진 순간은 정확히 일치했다. 그녀는 조급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스크림이 녹는 일은 없어야 했다.


오전 10시 30분. 그녀는 헤어드라이어로 아이스크림을 녹인다. 오늘의 맛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엄마는 외계인, 사랑에 빠진 딸기, 이렇게 세 가지 맛이다. 그녀의 취미는 배스킨라빈스 31가지 메뉴 중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골라 매일 아침 헤어드라이어로 녹이는 것, 10시30분 꼭 같은 시간에 말이다. 그녀가 단순히 녹이는 일에 취미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취미는 세면대 위에서 아이스크림을 녹이면서, 최초의 녹는 온도와 시간을 체크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많은 것들을 의심했다. 아이스크림을 용기에 담아 저울 위에 올릴 때 ‘정량보다 많이 드렸어요.’라고 말하는 점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아이스크림을 사서 뜨거운 바람에 녹는 시간으로 정량을 측정했다. 엄마는 외계인이 녹는데 걸리는 시간 34초, 어제는 41초였다. 어제와 같은 매장, 같은 직원에 의해 포장된 아이스크림인데 녹는 시간은 무려 7초 차이가 난다는 사실에 그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더 이상 시간도 믿지 않기로 했다.
‘눈에 보이는 건 믿지 않아.’ 그녀가 속삭였다.
이제 그녀가 오직 믿는 건 온도뿐이다. 온도는 거짓말 하는 법이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가 녹이려는 것은 아이스크림만이 아니었다. 연인을 만나는 때, 그가 녹는 시간도 측정했다. ‘형태가 있는 건 믿지 않는다.’ 그녀의 철학이었다. 형태가 있는 것들은 그 속에 보이지 않는 공간이 존재하고, 그 빈 공간에 감춘 것들을 의심한다. 그래서 흐를 수 있을 때까지 전부다 녹이는 거다. 그와 헤어지고 집에 들어와서는, 스탠드 조명에 의존한 채 그가 녹는 시간을 적어둔 파일을 열어 오늘의 자료를 기록했다.

어려서 그녀의 아버지는 늘 차가웠다. 말이 거칠었고, 손이 거칠었다. 술에 잔뜩 취한 날엔 여지없이 자고 있는 남매를 깨워 혼을 냈고, 맏딸인 그녀에게 손찌검을 일삼았다. 아버지는 술에 취했을 때나 다정한 행세를 하고 싶어 할 때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 표정이 어려서 그녀는 자주 헛갈렸다. 아버지의 기분 좋을 거라 착각한 어느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그린 가족그림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 무자비하게 찢기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때부터였다. 그녀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믿지 않기로 다짐했다. 아버지가 화가 났는지 아닌지 추정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어떤 기운이었다. 그의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기분을 종잡을 수 없는 날, 그의 등 뒤를 몇 번이고 몰래 지나다녔다. 한동안 그의 등 뒤에 발걸음을 멈춰서, 구부정한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측정했다. 그 온도가 사무치게 차가운 날엔 ‘아, 오늘도 나는 잠들지 못하고 손찌검을 당하겠구나.’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연인을 만나기 전, 그녀는 컴퓨터에 저장해둔 ‘그의 온도’라는 파일을 열었다. 최근 5개 자료의 평균값을 구했다. 그리고 자신의 타이머를 돌려 남자친구의 평균과 동일하게 설정했다. 반드시 같은 시간에 녹아 서로가 함께 섞여야 한다. 그녀의 계획이었다. 어느 한 쪽이 늦게 녹아내린다면, 그건 사랑의 온도가 다른 거라 믿기 때문이었다.


사랑은 섞이는 것이다, 완전한 액체 상태로 만나 두 사람이 합쳐지는 상태를 그녀는 사랑이라 불렀다.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흰 티만 입기를 강요했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 그녀가 제시한 유일한 조건이었다. 남자친구는 이유를 물었으나 답하지 않았다. 그냥 흰 티를 좋아한다는 말 밖에는. 남자친구는 물었다. 그러는 너는 왜 흰 티를 입지 않냐고. 그녀가 말했다. 흰 티 입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흰 티 입은 모습 보는 걸 좋아하는 거라고. 그녀는 감추고 싶은 마음이 많아서 그렇다는 것을 철저하게 숨겼다. 남자친구는 의아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세상은 겉과 속이 다른 것들로 넘쳐난다. 베리베리 스토로베리를 녹여도 바닐라의 연노란색이 나올 수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남자친구에게 흰 티 입기를 강요한 것도, 그가 녹았을 때 흰 티에 스며드는 색깔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 색은 빨간색. 심장의 색깔이어야 했다. 혹시라도 바닐라 색이 나오거나 초코 색이 묻어 나온다면, 가차 없이 그를 버릴 것이다. 내가 변한 게 아니라 그가 변한 거다. 그녀는 굳게 믿었다.


그래서 그녀는 매일 베스킨 라빈스에 가서 31가지 아이스크림을 사다 녹여보는 거다. 마트에서 파는 삼색 아이스크림은 벌거벗은 나체와 다를 게 없다. 정직하게 딸기맛 아이스크림은 분홍색만을 띄고,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단조로운 노란색을 띈다. 그러나 베스킨 라빈스는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조합을 만들어 파는 회사 아닌가. 딸기아이스크림 위에 초코칩을 올리기도 하고, 바닐라아이스크림 위에 땅콩을 올리기도 한다. 그리하여 딸기 맛 아이스크림을 녹인다고 분홍색 액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초코칩이 첨가된 딸기맛이라면 탁한 분홍색을 띌 것이고, 남자친구 심장이 그 색을 나타낸다면, 검은 마음을 숨겨두었다는 의미겠다. 그래서 그녀는 매일 아침, 정확한 사랑을 실험하기 위해 아이스크림을 사러 베스킨 라빈스에 간다.


당신의 흰 티셔츠는 반드시 내가 녹는 색깔로 물들어야 한다. 그게 사랑의 성립조건이라 그녀는 믿는다. 아이스크림의 이름은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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