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친구들은 죄다 왜 그 모양이야
비밀; 사랑할 때 우리가 감추고 있는 속마음
네 친구들은 죄다 왜 그 모양이야
“그 잔 내려놓고 일어나.”
카랑카랑한 여성의 목소리에 주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일제히 잔을 내려놓고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여성은 팔짱을 낀 채 한 남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초리를 받는 사람으로 추정되는 남성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고, 그 장면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눈앞에 잔뜩 화가 난 여성이 서있고, 당황한 남자는 술을 마시던 중이었으며, 그 남자의 팔엔 또 다른 여성의 팔이 감겨 있었다. “4주 뒤에 뵙겠습니다.” 신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장소를 옮기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문제의 남녀는 가게 앞에서 여전히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팔짱을 풀지 않았고, 그 앞에서 남자는 담배만 피울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얼마만큼의 애정도 남아 있지 않은 듯 해보였다. 담뱃불이 꺼지고 난 뒤, 남자는 생각의 마침표를 찍었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니, 정현이가 외롭다길래. 의리 지킨다고 앉아만 있었던 것뿐이야.” 여자의 표정은 이제 지친다고 말하고 있었다. “대체 네 친구들은 죄다 왜 그 모양이야.”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씩씩거리며 뒤돌아 걷기 시작했고, 여자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친구는 중요하다. 나의 속을 채운다는 면에서 아주 그렇다. 나는 술잔, 물잔, 커피잔, 아무튼 잔이라 이름 붙은 것들을 좀 좋아한다. 담는 그릇을 고르는 일이 어떤 요리를 먹느냐보다 중요한 날이 있으며, 때론 알맞게 고른 그릇이 신선한 재료보다 음식 맛을 한층 살리기도 한다.
애매한 저녁시간에, 혼자 술이나 한 잔 했음 싶은 그런 날에, 어떤 술을 마실까 고민하기 전, 기분에 맞는 유려한 잔을 우선 고르고, 그 잔의 용도에 맞는 술을 마시기도 사람으로서, 담는 속성을 가진 것들에게 느끼는 애정은 남다르다. 그리고 나는 식탁 위에 올려둔 술잔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정말 술잔이 나인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면 그 속을 채우는 술은 친구쯤 되지 않겠나, 자주 생각했다.
철이 들고 나서 느낀 건, 혼자서는 안 된다는 거다. 혼자 해낸 것 같아도,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와준 사람은 반드시 있기 마련인데 어려선 그걸 잘 몰랐다. 하다못해, 자식 잘 되라고 저녁마다 기도하는 우리 엄마라도 있어 이만큼 산다 생각하면, 인생에서 기울이는 대다수의 노력은 유려한 잔을 골라 조금 더 윤이 날 수 있도록 맨들맨들 닦아주는 작업이며, 친구와 부모님은 그 잔을 가득 채우는 술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잔이 실수로 깨어진다고 생각해봐라. 아찔하다. 술잔 안으로 붓는 술은 깨진 부위를 뚫고 새어나올 수밖에 없다. 쏟아지는 술을 견디지 못하고, 잔은 술에 압도당하게 된다. 당신의 연인이 친구들에 압도당한 것처럼.
사물에 자주 의미를 새기는 한 사람으로서, 옷걸이 역시 이유 없이 좋아하는 것들 중에 하나다. 나의 옷장은 좀 간사한 구석이 있는데, 아껴 입는 옷부터 화려하고 튼튼한 옷걸이에 걸어둔다. 그래서 자주 입지 않거나, 아까워 버리지 못한 옷들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얇고 하얀 옷걸이에 대충 걸쳐둔다. 사랑도 마찬가지.
상대가 정말 당신을 소중한 옷으로 대한다면, 그저 그런 옷걸이에 걸어두었으면 안 되는 거다. 감당하지 못하는 코트가 걸리는 때, 얇고 힘없는 옷걸이는 자주 휘어지고 뒤틀린다.
노력으로 붙잡으려 해도, 옷걸이의 변형을 막는 건, 옷의 능력이 아니다. 기분 좋게 옷장을 여는 때, 옷걸이에서 탈락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코트를 보는 것도 이젠 지겹지 않은가. 깨진 술잔과 맥없는 옷걸이는 고쳐 쓸 수 없는 거다. 잔혹하지만 이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