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철우 Jul 16. 2020

홀로 반대편에 있는 두려움을 통제할 수 있는가

사는 게 열등하냐고 내게 물었다

<홀로 반대편에 있는 두려움을 통제할 수 있는가.>

반대는 두렵다. 반대가 된다는 것은, 이유 없이 손가락질 받는 일이 그만큼 많아진다는 경고문과도 같으며, 진정으로 반대가 되기 위해선 그 경고문을 담담하게 읽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주 외롭고, 자주 공허하다.
 내 편이 없다. 억울한 일로 된통 당하고 왔을 때, 복수는 못해주더라도 그 인간 욕 정도는 같이 해줄 수 있는 친구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런데 반대편에는 그 조차도 없다. 있긴 있겠지. 듬성듬성. 반면에 건너편 사정은 다르다. 득실득실하다. 외로우면 자기네 쪽으로 건너오라고 내내 손짓한다. 젊은 날, 확고한 신념을 가졌던 사람도 나이가 들면서 정반대의 목소리에 앞장서 힘을 싣기도, 하는데 이게 다 외로워서 그런 거다.

 철학서를 좋아한다. 마음이 너무 힘들 때마다 자주 꺼내 읽는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그들은 한결같이 자기주장과 신념을 가졌느냐고 묻는다. ‘신념’이라는 단어를 처음 곱씹어본 고등학생 시절, 나는 많이 설렜었다. 교실 안에서는 선생님과 학생 모두가 같은 생각만 했고, 그들과 반대되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칠 때마다 표현하지 못했지만, 뭔가 적잖이 잘못되었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자기가 믿는 대로 학생이 믿고 따르길 바랬고, 반대는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학생 중에서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난 그게 참 이상했다. 그때 책에서 ‘신념’을 읽게 된 거다. 아찔했다. 남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드디어 누군가 말해준 것이다. 내 편이 생겼다는 의미겠다.

 당시엔 반항이라 써놓고, 신념이라 읽었는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대학 입시를 치루는 때, 자꾸 밑밥으로 성적보다 낮은 대학교 한 두 개만 쓰자고 하셨다. 그리고 웬만하면 대학을 높이고, 학과는 아무데나 가라는 거다. 짐작했겠지만 나는 선생님 제안을 따르지 않았다. 선생님 생각이 틀렸다고 말했다. 그런데 친구들조차 ‘객기 부리지 말라’며 만류했다. 내 진심을 알아준 건, 책 속의 한 줄뿐이었다. 그렇다고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상향 지원한 서류가 다 떨어지고, 스무 살이 되는 해, 원치 않는 공부를 일 년 더 하게 될까봐 무서웠고 불안했다. 뒤늦게, 밑밥이라도 하나 던져놨어야 됐나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 해 겨울, 내가 인생에서 쓸 수 있는 가장 큰 운을 끌어다 쓴 것 같았다. 상향 지원했던 대학으로부터 모조리 합격증을 받아낼 수 있었다. 아마 난 그 때부터 의심이 많아진 것 같다. 남들이 다 맞다고 하는 것들은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본다.
 
 순전히 운이었다. 상향 지원 했던 대학에 죄다 붙은 건 하늘이 한 일이다. 내가 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마치 그게 내가 이뤄낸 기적이나 되는 양, 신념이라는 단어 하나 믿고, 반대편에 계속 서있으려고만 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합격은 운이었다는 믿음이 더욱 확실해졌다. 전공학과를 선택하고 나서도, 영 흥미가 없어, 학교 밖에서 창업도 하고, 이런 저런 일을 많이 시도 했지만, 다 잘 안됐다. 내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라도 할라치면, 가족과 친구들이 나서서 만류하고 나섰다. 그래서 잘 될 줄 알았다. 대학입시처럼 말이다. 하지만 보란 듯이 실패했다.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고, 원망을 사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반대가 끌린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여전히 반대편에 서 있는 게 잘못된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꼰대라서 그런 게 아니다.

 두려움은 마음에 작용하는 중력이다. 단단한 대지를 밟고 서 있어도, 중력은 계속해서 우리의 발목을 잡아당긴다. 내려오라고. 내려오라고. 두려움도 마찬가지. 안정된 삶을 영유하기 위해 나랏밥 먹는다지만, 그 사람조차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늘에 닿기 위해 크게 한 번 뛰기라도 한다면, 중력과 두려움은 더 세게 당신의 발목을 잡아당길 것이다.
 반대편에 서는 것은, 제자리 점프로 하늘에 가닿는 일이 아니다. 아무리 높이 뛰어도 하늘에 닿을 수 없다. 명백하다. 다만 지금보다 더 높이 뛰고 싶은 인간의 소망일뿐이다. 그래서 뛰는 거다. 제자리 뛰는 동안에만 중력과 두려움을 잠시 동안이라도 잊을 수 있다.

 혼자 뛰면 외롭다. 하지만, 땅에 발붙인 사람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있어도 외롭다. 인간은 어차피 외로운 존재다. 그러니 뛰고 싶으면 마음껏 뛰어야 된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야 되고, 이번 생에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그것도 이뤄야 된다. 물론 중력과 두려움은 항상 우리 발밑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그냥 다 잊고 아이가 되는 거다. 폴짝폴짝 뛸 때 아이들은 그렇게 해맑을 수가 없다. 중력 거스르는 재미를 아는 거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두렵고 외로움 마음 거스르는 재미는 왜 모르는 걸까. 중력과 두려움은 같은 건데.

매거진의 이전글 아침마다 눈 뜰 이유 하나쯤은 있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