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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우 Jul 10. 2020

아침마다 눈 뜰 이유 하나쯤은 있어야...

사는 게 열등하냐고 내게 물었다

<침마다 눈 뜰 이유 하나쯤은 있어야 사는 지겨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는 건 지겨운 일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직장에 출근하고, 심지어 매일 같은 카페에서 커피를 사 마시는 경우도 허다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이어지는 이 지루한 일중일 중에서 목요일 하루 정도 슬쩍 빼낸다 해도 티조차 나지 않을 이 반복되는 쳇바퀴가 당신과 나는 너무나도 지겹다.


 사람은 변화를 원한다. 안정된 삶이 최고라 여겨 공무원으로 산다는 사람 많이 봤지만, 그들조차 변화를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이 지루한 일주일 중에 유일하게 바뀌는 것은 점심메뉴 뿐인데, 그조차 마땅한 대안이 없어 어제 먹은 걸 또 먹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이유모를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던가.

 내가 출근하는 사무실 주변에는 정말 ‘한솥’밖에 없다. 메뉴판에 삼십 여개 메뉴가 있지만 죄다 돈까스와 불고기를 여러가지 조합으로 섞어 만든 메뉴일 뿐이다. 그거 삼년 참고 먹었는데, 어제는 그렇게 화가 나더라. 어설픈 인생에 밥조차 어설픈 것만 먹어야 되나 싶어서, 제육볶음 집던 젓가락을 휙 내려놓고 도시락 뚜껑을 덮어버렸다. 사실 이건 제육볶음한테 화내는 척하면서 나한테 내는 짜증이었다. 반복되는 지루한 삶에 대한 투정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사는 건 지겨운 일이다. 산다는 건, 그 지루한 일을 지겹지 않게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고, 시도하고, 실패하는 과정의 반복이라 봐도 무방하다. 요즘 나는 많이 지루하다. 내 처치가 퍽 고인물 같이 흐르지도 않고, 배수도 안 되는 것 같아서. 괜히 심술 한 번 부려 썩은 물을 자처해버릴까, 못된 마음도 여러 번 먹기도 했다.


 결국 사람은 자기만족으로 사는 거다. 겸손함이 미덕이지만, 이 열등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자기 잘난 걸 알아야 한다. 여럿은 아니어도 좋고, 하나뿐이라 해도 좋다. 죽고 싶을 정도로 자존심상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 한강다리로 직행하지 않으려면 내가 나를 위로해야 하는데, 무턱대고 괜찮다 괜찮다, 말해줄 수는 없는 거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스스로 위로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더 많은 구체적인 근거를 원해서 그렇다. 그래서 때론 내가 잘난 것도 알아야 된다는 거다. 그래야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가며 진심으로 내가 나를 위로할 수 있다.


 어차피 인생은 독고다이. 다른 사람의 위로는 소용없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거니까, 상처받은 영혼도 내가 치료해야 진짜 치료인 거다. 괜히 어설프게 친구 불러 맞은편에 앉혀두고, 어쭙잖은 위로 몇 마디 주워 듣는다고 마음 속 깊이 새긴 상처가 아무는 건 아니니까.

 나는 스스로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사실이다. 한참 부족하다. 그럼에도 한 가지 잘난 점을 꼽으라면, 쉬지 않고, 지치지 않고 글을 꾸준히 쓴다는 것이다. 못해도 포기하지 않는 지구력이 있다는 거다. 그래서 복도 좀 많이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 마음 깊이 담겨있는 진심을 글로 표현해낼 재간이 없더라도, 꾸준히 글을 쓰고 싶고 출판을 통해 세상에 편지를 부치고 싶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매일 아침, 잠도 채 못자고 일어나 책상 앞에 앉기도 했다. 그런데 그 글들이 최근 몇 달간 전부다 거절당했다는 거다.


 이건 아픈 고백이다. 어떤 면에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며,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고백하는 이유엔, 고백하고 났을 때 느껴지는 모종의 개운함이 좋기 때문이다. 나만 잘난 것처럼 카메라 앞에 앉아서 세간의 동경과 존경을 받고자 하는 건 전혀 내가 아니다. 나의 아픈 일이 당신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부끄럽더라도 기꺼이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에세이 쓰는 작가의 덕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린 똑같다. 정말 똑같다.


 아무튼, 원고제안이 모조리 반려당한 것은 내게 꽤나 아픈 일이었다. 한 번이 아니다. 세상에 나오지 못한 원고가 세 개정도 되고, 출판사 제안만 100번 가까이 했을 테니, 탈이 나도 진작에 났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꿋꿋이 버티다가 결국 100번째 거절 메일을 받았을 때 나는 동굴로 들어가야겠다, 그렇게 마음 먹었다.
 한동안 글이 싫었고, 생각은 비관적이었다. 아침에 눈을 뜰 이유가 없었다. 눈 뜨면 커피 한 잔 내려 노트북 앞에 앉는 것이 나의 일이겠으나, 써봐야 출판도 안 되는 이 글을 왜 써야 하는지에 대해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머리가 조금 아팠고 울적했다.
 이러다 이제 책을 못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섣부른 결론을 단정 짓기도 했으며, 시선에 거슬리는 모든 사물에 화가 나기도 했다. 한솥 도시락이 대표적인 예라면 예다.


 어설픈 도시락 삼년 먹으면서도, 그마저 먹을 수 있어 감사해하던 삼년이었다. 나는 도전하고 있었고, 그 도전이 힘들어도 설렜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는 설레지 않는 시기가 찾아왔다. 하루에 한 번 키보드 위로 손을 올려놓지 않더라도 죄책감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글은 사양산업이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마음이 나아지지 않더라는 것이 핵심이다.


 지금 나는 좀 어둡고 긴 터널 속을 걷고 있다. 입구로부터 얼마나 걸어왔는지, 출구까지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지, 한치 앞도 모른다. 기나긴 어둠이 생각보다 빨리 끝날 수도 있고, 생각보다 많이 오랜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일 것이다. 답답한 날의 연속이지만, 아직까진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기나긴 터널 속에서 지치지 않고 걸어나갈 수 있는 방법을 오늘부터 연구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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