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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우 Jun 24. 2020

<나는 가끔 내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사는 게 열등하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가끔 내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자못 차트의 시대다. 비교하지 않고는 마트에서 팽이 버섯 한 봉지도 마음 편히 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어차피 삼겹살 옆에 구워 먹으면 그 맛이 그 맛일 텐데, 원산지가 강원도인지 경상도인지 꼭 따져 묻고, 유기농인지 아닌지 작은 글씨 읽어가며 꼼꼼히 확인한 뒤에야 최종결정하게 된다. 이제 겨우 버섯 한 봉지. 삼겹살 고르고, 상추에 마늘까지 고르고 나면 집 도착할 때쯤 남은 힘이 없어 배달의 민족 들어가 치킨 시켜먹을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는 비교를 멈추지 않는다.


 자못 열등감의 시대다. 가끔 나는, 고작 팽이버섯 한 봉지를 유기농으로 고르지 못해 열등해지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유기농이라 해봤자 한 팩에 오천 원도 안 하는 그 사소한 것 때문에 하루의 기분을 소진시키기도 한다는 말이다.


 머리는 주인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유기농 버섯을 먹는 사람들은 어떤 아파트에 살고, 어떤 차를 타며, 어떤 불판 위에 고기 구워 먹는지. 될 수 있는 대로 열등해지기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나의 묘사에 의미를 부여한다. 아주 나쁜 상상이다. 그 끝에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내 자신이 초라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고작 팽이버섯 한 봉지 때문에 말이다.

 나는 순위를 매기는 사회가 좀 무섭다. 순위 뒤에 따라 붙는 유명한 단어가 뭔가. 조작이다.  조작이 팽배하는 세상에 진심은 없다. 진심은 희석되고, 옅어지고, 분해된다. 조작된 순위 속에서 진심은 밥벌이가 되지 못한다. 뼈저리게 이 사실을 깨달은 많은 현대인들은 차라리 조작에 동참하기로 한 듯싶다. 나를 버리고, 세상에 나를 끼워 맞춘다. 조작된 사회 속에서 꽤 비중 있는 톱니바퀴가 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믿는 나 또한 때때로 조작된 사회 속의 뾰족한 톱니바퀴가 되길 자처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주 처절한 사회다. 우리는 스스로를 버리면서까지 뭐가 그렇게 얻고 싶은 것일까.

 가끔 내가 영화 속에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져들곤 한다.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은데, 나 빼고 전부 이게 맞는 거라고 바득바득 우긴다. 이해할 수 없다.


삶을 자기가 정한 의미대로 사는 게 뭐가 잘못된 일인가. 잘못되지 않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지금 돈 좀 못 버는 게 그렇게 비난받을 일인가.

아니다.


그런데 “너 20년 뒤에도 그러고 있을래?”라는 말로 왜 자꾸 기를 죽이냐는 말이다. 당장 내일 일도 모르는데, 20년 뒤엣 일까지 어떻게 걱정하고 사냐, 매번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면 또 친구나 가족들은 고집 부린다고 하겠지만, 고집이라면 고집이고 아집이라면 아집이다. 만약 당신도 친구나 가족으로부터 비슷한 말을 한 번이라도 들은 적 있다면, 그건 당신이 너무 질투 나서 그런 것이다. ‘누군가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니! 인생 참 잘 살았다!’ 생각하고 넘기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같은 말을 며칠 내로 반복해서 듣거나, 마침 그날 오전에 일이 잔뜩 꼬여 있었더라면, 아마도 당신은 친구나 가족의 비난을 아집과 고집만으로 버텨내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럴 땐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자. ‘어차피 다 O밥이다.’

한결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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