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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우 Jul 27. 2020

도시락 싸보셨나요?

사는 게 열등하냐고 삶이 내게 물었다.

<도시락 싸보셨나요?>

나는 요리를 좋아한다. 확실히 음식보다 요리가 더 좋다. 내게 음식은 입 안에 들어가 씹어 넘길 수 있는 것들이면 다 음식이다. 요리는 아니다. 요리는 한 편의 영화다. 도입부는 대형마트에 가서 장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고기요리를 할까, 면 요리를 할까, 아니면 둘 다 해 버릴까. 아니야. 그러기엔 또 너무 많아. 어떡하지.


 요리는 분명 대상이 존재한다. 나일 수 있고, 친구일수도 있다. 연인일 수 있고, 부모님일 수 있다. 우린 그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한다. 마트에 가서 재료를 고르는 동안, 고른 재료를 집으로 가져와 볶고 끓이는 동안, 그 한 사람을 염두에 둔다.


‘그가 좋아해줬으면 좋겠어.’


모든 요리사들의 마음일 것이다. 그 정성은 편의점에 파는 삼각김밥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대상도 목적도 없이 진열대에 툭 올려져있는 음식, 누가 먹어도 되고, 누가 먹지 않아도 슬퍼하는 이 없는 음식은 정성스럽게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그런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연명하는 중이다. 한 삼일 연달아 먹던 날, 구석에서 혼자 울컥했다. 밥에서 편의점 맛이 났다. 삶에서 편의점 맛이 났다.


모든 게 어설펐다.

 스무 살 넘으면 한두 가지 요리쯤은 할 줄 아는 것이 좋다. 더 이상 부모 손에 매 끼니를 위탁해서는 안 된다. 혼자 장도 봐야 한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 장바구니의 중력이 얼마나 위대한지 느껴봐야 한다. 등짝 때리던 엄마 손이 괜히 매운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평소 갈고 닦은 실력으로 자신의 스무 번째 생일날 미역국은 자기 손으로 직접 끓여야 한다. 내가 국회의원이었으면, 법으로 발의 했을 거다. 미역국법이다.(아, 물론 정치할 생각은 없다).


 분명 찡할 거다. 울컥도 할거다. 울컥하는 게 나 하나가 아니라는 것, 20년 동안 울컥해놓고 생색 한 번 안 낸 사람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알 필요가 있다. 이 날이 어버이날이다. 5월8일에 영혼 없이 카네이션만 배달시키는 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다.

 요리 안에는 마음이 있다. 삼각김밥 안에는 없는 걱정이 있다. 안부가 있다. 사랑이 녹아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은 요리를 대접해주고 싶다. 우선 그 좋은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 아침은 커피로 대신하더라도, 점심은 밖에서 끼니를 대충 때우더라도, 저녁만큼은 내가 나한테 손수 대접하고 싶다.


그 밥 얻어먹을 자격 있을 만큼만, 딱 그만큼만 살아내자, 내 삶의 작은 신조다.


그다음, 당신이란 사람한테 요리를 대접할거다. 나는 충만한 사람만이 타인의 빈공간을 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밥 대접도 나한테 먼저 하는 거다. 당신은 두 번째다. 그렇다고 서운해 할 건 없다. 항상 처음은 시행착오가 있을 수밖에 없다. 뭘 해도 두 번 하면 잘한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대접하는 밥이 나한테 대접한 밥보다 맛 좋을 가능성도 다분하지 않은가.


 내게 관계 맺기는 요리를 대접하고 싶은 ‘당신’을 찾는 행위다. 그 당신을 연인에 한정 시킨다면, 그건 너무 촌스러운 발상이다. 나의 하루에 개입한 적 있다면, ‘당신’의 요건은 이미 충족되었다. 다만 그 중에 내가 선택한 사람만이 내게 ‘당신’의 자격이 주어진다.


 가게에서 밥 한 끼 사는 정도야 누구한테도 할 수 있다. 비즈니스 관계에서 흔히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렇지만 요리는 다르다. 볶고 끓이는 행위는 정성 없인 안 된다. 경제적으로 따지더라도, 밖에서 사 먹는 밥이 더 싸게 치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시간과 돈을 써 장을 보고 요리를 한다는 건,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돈을 쓸 순 있어도 시간을 쓸 순 없다. 돈을 쓸 순 있어도 정성을 쏟을 순 없다. 손 편지가 감동적인 이유다.


 예전에 모 중학교 강의를 하러 간 적이 있었다. 대강당에서 나는 폼 잡고 두 시간을 떠들었지만, 아이들은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했다. 내가 재미없는 사람이라 그런 것은 아니었다(나는 그렇게 믿는다). 중학교는 평소 6교시까지 수업이 있다. 일주일에 딱 하루, 7교시 수업이 있는데 학교 측이 하필이면 그때 강의를 잡아둔 것이었다. 아이들은 심통이 난 것이다. 무려 한 시간 집에 늦게 가는 것도 서러운데, 휴대폰 사용도 못하게 하지, 처음 보는 사람 이야기에 집중까지 해야 했으니 아이들 나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강의가 끝났다. 아이들이 앉은 좌석을 가로질러 뒷문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중간 쯤 지났을까, 한 여학생이 내 손을 덜컥 잡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랐다. 이 기분이 뭐랄까. 아무튼 소리를 안 지른 것만 해도 천만다행, 너무 없어 보일 뻔 했다. 손을 놓고 보니, 내 손바닥 안에 작은 포스트잇이 들어와 있었다. 아이는 쑥스러운지 손을 놓고, 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마저 걸었다. 제자리에 서서 모두의 관심을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손바닥을 펴보고 싶은 충동은 참기 힘들었다. 배웅해주러 따라 나온 선생님께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강당을 빠져나갔다. 무슨 러브레터라도 받은 사춘기 남학생처럼 설레었다. 뛰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걸음으로 학교를 벗어났다. 손바닥을 펼쳤다.


 ‘오늘 너무 좋았어요.’


 손바닥 안에 우주를 품은 기분이었다.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타러 가는 길, 오른 손바닥을 쥐락펴락 반복했다. 손의 움직임에 따라 포스트잇도 주름졌다 펴지길 반복했다. 나는 그날의 기억과 포스트잇을 책상 앞에 붙여 두었다. 몇 년이 지났지만, 추억과 메시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성이 들어간 것들에는 추억이 깃든다. 타인이 나를 위해 차려준 식탁을 잊지 못한다. 오랜시간 지나도 그 날의 식탁에 어떤 음식이 차려져 있었는지, 그 맛이 어땠는지 선명히 기억해낼 수 있다. 손편지도 마찬가지. 굳이 암기하지 않아도, 안에 적힌 문장들이 저절로 외워지기도 한다. 표현만 놓고 보면 진부할지 몰라도, 편지에 적힌 모든 문장은 유려하다. 시간이 지나면 그 감동이 처음과 같진 않겠지만, 문득문득 삶 속에 편지에 적힌 문장들이 튀어나와 영혼을 따뜻하게 데운다.


 사랑이 필요한 날. 누군가를 위해 도시락을 싸보는 건 어떨까. 빈 시간에 한 끼 대충 사먹는 것이 오히려 간편할지도 모르지만, 도시락은 당신의 한 끼마저 염려한다는 애증의 표현이다. 작은 포스트잇에 편지도 적어 뚜껑 위에 붙여두는 거다. 아, 난 아마 그날 점심은 목이 메여 먹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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