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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우 Jul 31. 2020

왼쪽 허벅지가 따듯했던 남자

사는 게 열등하냐고 삶이 내게 물었다

<왼쪽 허벅지가 따듯했던 남자>

올해는 장마가 늦다. 밖에는 비가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다. 7월 마지막 날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더운 건 참아도 습한 건 못 참아. 아, 진짜 못 참겠는데. 지난 달 수리했던 에어컨은 장마철에 맞춰 다시 말썽이다. 그런 에어컨을 바라보고 있자니 머릿속에 별 생각이 다 든다. 사람이었으면 꿀밤이라도 한 대 먹여줬겠지만, 저 낡은 에어컨도 나이 먹은 게 서러워서 그러는 거겠지. 착한 내가 참기로 한다.  
 
 저녁에 술약속이 있었다. 비오는 날 지하철 타는 건 영 별로다. 우산에서 똑똑 떨어진 물방울이 열차 바닥을 적신다. 습기가 찬다. 게다가 이번 여름은 KF94까지 들숨 날숨을 가로막는다. 뺨이 축축하다. 최악이다. 그러나 앉을 자리가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문제는 다음 정거장에서 발생하는데...


 중년 남성이 탑승했다. 마침, 내 오른 편 자리가 비어 있었고, 게이트 열리자마자 중년은 열차 안으로 뛰어 들었다. 내리려는 모든 사람을 밀치면서 말이다. 그의 목표는 내 옆자리였다. 나는 제발 저 무례한 아저씨가 내 옆에 앉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신은 내 편이 아니었는지, 중년 사내를 기어코 내 오른편에 앉는 것을 허용하는 게 아닌가. 아.


 남자는 헛기침을 크게 한 번 한 뒤 자리에 앉았다. 스마트폰으로 연신 뭔가 하는 시늉을 하면서 말이다. 대략 10초가 지났다. 자신의 무례함에 더 이상 눈길 주는 이가 없다는 것을 직감한 뒤에 스마트폰을 덮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어진 행동이었다. 의자 반쯤에 걸려 있던 엉덩이를 끝까지 쓱 밀고 들어오는 게 아닌가. 그 엉덩이에 나의 골반과 옆 사람의 골반이 밀리고, 내 어깨와 옆 사람 어깨가 밀렸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팔짱까지 끼는 오만함을 보였다. 그러곤 또 눈을 감는 거다. 참.


 오른쪽 허벅지가 뜨겁다. 어린 시절, 엄마가 불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사라지면, 나는 그 물에 몰래 손가락을 담궜다. 차디 찬 물은 온도가 높아지면서 찬기를 잃고 미지근해지다 결국엔 뜨거워졌다.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온도가 손가락에 전해지기 시작하면 주전자 안에서 손가락을 뺐다.


딱, 그 느낌이었다.


에어컨 영향으로 냉각된 나의 오른쪽 허벅지가 점점 달아올랐다. 그 불은 중년 남성의 왼쪽 허벅지였다. 짧은 다리를 좌우로 죽 찢어, 내 오른 허벅지에 자신의 왼쪽 허벅지를 갖다 댄 것이었다. 중년의 왼쪽 허벅지 열기가 내 오른쪽 허벅지에 스미고 있었다. 아, 스민다는 말은 취소. 이런 장면에 붙이기엔 너무 아까운 표현이다. 음, 전달. 그래 열전달 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엄청’ 불쾌했다.

 불편한 사람과 불쾌한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둘은 엄연히 다르다. 당신과 내가 가진 기질이 상극일 때 우린 서로가 불편하다. 그건 내 잘못도, 당신 잘못도 아니다. 단지 우린 생각과 취향이 많이 달라서 서로가 불편할 뿐이다.


 반면에 불쾌감은 대부분의 경우 무례한 행동에서 시작된다. 무례해서 불쾌하다. 물론 나도 누군가에게 불편한 사람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지하철에서 다리를 벌린다거나 큰 소리로 통화하는 무례함을 보임으로서, 불쾌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정도의 주의는 기울인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중년의 머릿속에서 언어를 담당하는 기관만 슥 한 번 들여다보고 싶었다. 분명 ‘무례하다’는 형용사는 그 속에 없을 것이다.

 습습한 장마의 계절엔 많은 인내를 강요받는다. 나는 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열차 끝으로 가 섰다.


사랑한 적 없는 사람과의 체온 교류는 불쾌하다.


연일 뉴스에 유명 정치인들의 성추문이 끊이질 않고 쏟아지고 있다. 기사 밑엔 셀 수 없는 악플이 달리고 있다. 피해자를 향해 악의적으로 비아냥거리는 악플러들을 데려와 방금 내가 일어섰던 자리에 앉혀보고 싶다. 사랑한 적 없는 이의 손끝이, 그 체온이 얼마나 불쾌한지 느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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