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는 일들에 대한 사랑>
사는 게 열등하냐고, 삶이 내게 물었다
<어쩔 수 없는 일들에 대한 사랑>
이를테면 길을 걷다 예보에 없던 소나기를 만나 흠뻑 젖는다거나, 내 입에서 나온 말들이 의도와 상관없이 와전되어 주변의 오해를 사게 되는 건, 좀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로 넘겨버리는 편이 좋다. 그러는 편이 여남은 정신건강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이론이다.
현실은 많이 다르다. 어쩔 수 없는 일들을 어쩔 수 없는 상태로 둘 수 있는 사람이 지구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스님이 아니고서야, 저마다 바라는 게 있고, 갖고 싶은 게 많다. 꿈을 이루고 싶고, 돈을 벌고 싶다. 그래서 우린 기회를 원한다.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 이 시대 청년들이 바라는 건 딱 하나, 단지 그 기회라는 것이 내 차례까지 공평하게 돌아오길 바랄 뿐이다.
그럼에도 기회는 냉정하다. 도무지 내 차례까지 돌아올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아프고, 서럽다. 이 시대, 기회를 가진 자들은 SNS 안에만 산다. 그들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지 모든 기회를 다 가진 듯 돈을 벌고, 인기를 얻는다. 그 모습이 그렇게 배 아프고 억울했던 적이, 내 청춘 속에도 여러 날 있었다.
나는 확률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처음 글 쓰고 싶다고 했을 때 제일 많이 들었던 말, ‘그걸로 밥 먹고 사는 사람 몇 명이나 되냐.’. 맞다. 여전히 글을 좋아하지만, 글은 밥이 되지 않는다. 한때 그게 너무 억울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나쁜 일 하는 것도 아닌데, 매번 내 꿈은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비난이 맞아떨어지기라도 하듯, 내 글은 팔리지 않았고, 앞으로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나는 이 모든 탓을 세상에다 하고 싶었다.
기회가 공평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강남 교보문고에 가면 꼭 ‘에세이 베스트’코너에 놓인 책들을 하나씩 집어들었다. 대충 앞뒤로 뒤집어 표지한 번 슥 보고, 휘리릭 넘겨 책 내용을 훑었다. 한 권도 빠짐없이 그렇게 했다. 그러고 나면 머릿속에는 오만한 생각만 남았다. 내 글이 이런 감성팔이 책들보다 못할 리 없어,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열등감에 싸인 사람은 광기를 분출한다. 금방 터지기라도 할 듯 뜨겁게 끓는다. 그 당시 나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백두산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들은 꼭 내게만 일어났다. 그리고 밀도있게 일어났다. 나는 매일밤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어찌해보려고 발버둥 쳤다. 그럴수록 점점 더 어쩔 수 없어졌다. 머리는 복잡했고, 몸은 아팠다. 필요한 건 마음의 휴식이었지만, 그럴수록 나는 몸을 더 혹사시켰다. 잠도 줄이고 밤늦게까지 운동을 하며 에너지를 분출했다. 말이 에너지지 그건 광기였다. 분노를 괜한 운동기구에다 풀었던 것이다. 조급했고, 많이 조급했다. 내일 당장 이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순간 나는 직감했다. 곧 내가 터져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욕심은 풍선이다. 풍선은 너무 탱탱해도, 너무 헐렁해도 안 된다. 적당한 날숨을 머금고 있을 때, 그 피부에서 윤기가 나고, 손에 쥐고 다녀도 멋이 난다. 욕심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욕심이 가득차면, 얇은 바늘이 스치기만 해도 ‘펑’ 터져 버린다. 들숨 날숨 박자에 맞춰 여태까지 부풀려온 풍선을 한방에 터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럴 땐 풍선 꽁지 잡고 있던 손을 떼, 바람을 조금, 욕심을 조금 빼줘야 한다. 딱 윤기날 때까지만. 적당한 욕심이 멋으로 느껴질 정도만 품고 살아야 한다. 어찌할 수 없는 일을 어찌해보려고 하는 건, 이미 부풀어오른 풍선에다 또 한번 숨을 불어넣는 일이다.
나는 시간의 힘을 믿는다. 나이 먹는 건 서럽지만, 그만큼 노련함이 삶에 더해질 것이라 믿는다. 어쩔 수 없는 것들은 어쩔 수 없는 상태로 두자.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거다. 세상이 아무리 불공평해도, 한번은 내 차례가 있다고 믿기로 하자. 그 믿음마저 없다면 인생은 좀 재미없다.
그럼에도 ‘코로나19’사태로 인해 가계부채에 시달리고 있는 분들에겐 해당사항 없는 말이다. 생계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와는 좀 다르다. 그렇게 치면, 나는 좀 행복한 걸까.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