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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우 Aug 26. 2020

<마음에도 상비약이 필요합니다>

사는 게 열등하냐고, 삶이 내게 물었다

<마음에도 상비약이 필요합니다>

 아프고 싶지 않다. 아플거라면, 아파야만 한다면 그냥 세게 한 번 아프고, 금방 나았으면 좋겠다. 나는 고열보다 잔열에 더 크게 진동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잔열이 주는 희망 고문이 얼마나 얄팍한지 알기 때문이다. 자꾸만 시험에 빠트린다. 내일은 나을 거야, 또 내일은 나을 거야, 희망을 품게 한다. 하지만 내일은, 내일에도 내일이 되고, 잔열은 목적지 없이 앞으로만 내달리는 폭주기관차가 된다.


반면에 고열처럼 극한으로 치닫는 고통은, 그 순간엔 괴롭지만 통증이 금방 사라진다는 것 또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애초에 몸과 마음은, 극한의 고통을 반복해서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병의 불씨가 꺼지든, 생명의 불씨가 꺼지든 둘 중 하나는 반드시 꺼진다. 끝이 있다. 멀지 않은 곳에 끝이 있다. 그래서 나는 잔열이 더 싫다. 잊을만하면 나타나, 문득문득 괴롭히는 것들에 질색한다. 끝이 없다. 끝은 있겠지, 그렇지만 그 끝이 어디쯤인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 그게 나를 너무나 괴롭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턴가 진통제를 삼키지 않았다. ‘일시적으로’ ‘한시동안’ ‘잠시만’처럼 짧은 순간만,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겠다고 약속하는 것들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진통제의 숨은 의미는 ‘잠시 뒤 다시 아픔’이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진통제가 치료제라도 되는 양, 그것들에 의존해왔다. 지난 날, 이별의 아픔을 잠시 외면해보자고 시답잖은 사람을 붙들고 위로를 갈구한 적 얼마나 많았던가. ‘한시동안’이라는 약속된 시간이 끝난 뒤, 그 사람을 다시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공허함에 얼마나 자신을 자책했었는가.

 나는 완벽을 원했고, 완전을 원했다. 약을 먹어야 한다면, 그건 진통제가 아니라 치료제이길 바랬다. 병에 알맞은 치료제가 없다면, 나는 이번 생을 치료제 연구에 써야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기억 속에 여러 날 있었다. 오늘 그 결과물을 공개하려고 한다.


 없다. 이 세상에 완벽한 것도, 완전한 것도 없다. 그래서 영원한 치료제도 없다. 한 알만 먹으면, 영원히 아프지 않을 수 있는 치료제 같은 건 없는 거다. 우린 아플 거다. 분명 오늘도 아프고, 내일도 아플 거다. 쉬지 않고 아플 예정이며, 고통은 문득문득 찾아오기 때문에 미리 예측하는 것도 쉽지 않을 거다. 고통의 시기를 예측한다는 건, 주식 오르는 타이밍을 예측하는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없다.

 없앨 수 없고, 막을 수 없는 것들은 예방만이 답이다. 홍수를 대비해 제방을 세우듯, 마음에도 견고한 제방을 세워야 한다. 슬픔보다 행복에 가까이 사는 사람을 만나고, 부정적이기 보다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곁에 두는 거다.


 그리고 상비약도 좀 준비해둬야 한다. 내게 그 상비약은 책이다. 내 삶이 감당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느껴질 땐, 내 영혼을 다른 세상으로 잠시 대피시킬 필요가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 속에 들어가 잠시 살다 오는 거다. 어떤 의미에서 영혼의 휴가라고도 할 수 있다. 휴가에서 돌아올 때쯤, 내 삶도 아직 살아볼만 하다, 그 한마디만 챙겨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작정 떠나는 거다.
 
 그렇다. 이건 다 진통제에 관한 이야기다. 한 알만 먹으면, 영원히 아프지 않을 수 있는 치료제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로, 다양한 종류의 진통제를 구비하는데 생의 에너지를 쓰는 중이다.
 햇살이 좋다. 아직 살아볼만한 세상이다. 다들 존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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