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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우 Sep 24. 2020

<개와 늑대의 시간>

사는 게 열등하냐고, 삶이 내게 물었다

<개와 늑대의 시간>

개와 늑대의 시간.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이 말은, 한국에서 드라마 제목으로 유명하다. 국정원 역할을 맡았던 이준기 배우가 거대 폭력조직에 잠입해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사고를 당해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덕분에 완전한 스파이가 되어 버린 설정이, 그 시절 내겐 꽤 강렬하게 느껴졌다.


 프랑스에서는 황혼을 L’heure entre chien et loup(르허터샤이름)이라고 부르는데, 이 문장을 한국에서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밤의 짙은 푸른색과 낮의 짙은 붉은색이 만나 저 멀리서 다가오는 실루엣이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대라고 해서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감상적이지만 동시에 서늘함이 느껴진다.


 개는 사람한테 다정한 동물이다. 집에 돌아오면 사람보다 먼저 반겨주고, 낮에는 산책길을 따라 걷는다. 밤에 낯선 사람이 침입하면 큰 소리로 짖어 위협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한다. 오랜 시간 친구면서 보호자였다.

 반면 늑대는 어떤가. 늑대 뒤엔 잡아 먹는다는 말밖엔 덧붙일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개와 늑대를 헷갈려 한다는 거다. 아군과 적군을 헷갈려 한다는 거다. 그런 시간이 하루에 한 번 꼭 있다는 거다. 내게도 하루에 한 번 그 시간이 꼭 있다.


 나는 많은 것들을 의심한다. 주로 내가 확신하는 것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내가 좋다고 믿어온 것들이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맞는지 아닌지 의심한다. 나는 이 의심병이 살면서 반은 득이었고, 반은 실이었다고 생각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 우리는 선택을 한다.


매 순간 선택이 어느 쪽이든, 그것에 의해 내 삶은 강렬하게 자극받고, 그 자극들이 모여 지금의 내 삶을 이루고 있다.


 오늘이 내게 젊은 시절이라면, 이전의 시간은 어린 시절이라 부르는 게 맞을 것 같다. 나는 그 어린 시절에 선택한 것들을 젊은 시절 내내 참 많이도 의심했다.

 그 결과 어린 시절 엔지니어가 될 줄 알았던 소년은, 젊은 시절 글 쓰는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 기계만 만지면 흥분하던 소년은 슬픈 영화를 봐도 울지 않았다. 할아버지 장례식장에 가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무뚝뚝한 소년이 사람의 감정을 어루만지는 에세이를 쓰고, 시를 쓴다. 하루에 돈 만 원 버는 것보다 좋은 글 한 줄 쓰고 마침표를 찍었을 때 더 많이 기뻐하게 되었다.


원인과 결과만 놓고 보면 성장과정에 큰 영감을 받은 계기가 있었을 것 같지만, 그런 거창한 계기 따위는 없었다. 단지 의심을 많이 했을 뿐이다. 의심을 하다 보니, 내가 좋아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에 대한 기준이 명확해졌고, 돈을 받아야만 하는 일과 돈을 받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심신이 미약하다. 황혼 질 무렵, 개와 늑대의 형상만 헷갈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모습이 개인지 늑대인지 많이 헷갈린다. 이 길을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는지, 글 쓰는 일이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인지 여전히 만 5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의심하고 있다.


 냉정하게 말해서 글이 돈을 많이 벌어다주면 이런 의심 따윈 이틀에 한 번, 아니 일주일에 한 번 꼴로 하게 되겠지만, 글은 젠장 밥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매일 시험받는다. 중도에 포기하는 법, 삶의 의미는 집어 던지고 돈만 쫓는 철저히 자본화된 인간이 되는 건 어떤지 매일 고민해본다.


그럼에도 아직까진 낭만과 철학이 내 안에서 이기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구구절절 세상의 고민을 들어주는 척, 내 고민을 털어놓고 있다.


 나는 누구에게 다정한 사람이었을까.


고민하기 좋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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