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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우 Sep 24. 2020

<화가 날 땐 그냥 화를 내세요>

사는 게 열등하냐고, 삶이 내게 물었다

<화가 날 땐 그냥 화를 내세요>

요즘 내 최대 관심사는 올빼미 생활을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정도다. 여름이었다. 한낮의 더위로부터 피하고, 밤의 침착함을 즐기기 위해서 올빼미 생활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여름은 너무 밝았다. 덕분에 보고 싶지 않은 것들도 두 눈에 너무 선명히 담을 수밖에 없었다.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밤이 되면 온 집안의 불을 꺼놓고 작은 무드등에만 의존한 채 생활해왔다. 옅은 불빛은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보고 싶은 것만 불빛 아래 놓을 수 있어 좋았다. 조명은 책장에 오래 묻어둔 책 한권과 500ML 맥주 한 캔. 그 이상을 비추지 못했다. 내게 세상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이젠 가을이다. 어제부터 부쩍 가을이다. 드디어 아침에 일찍 일어날 명분이 생겼다. 이제 하늘은 높고 바람은 선선하다. 특히 가을바람은 오전바람과 오후바람으로 나뉘는데, 오전바람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냄새와 질감이 있다. 나는 그것들을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올빼미 생활을 청산을 하려고, 12시 이전 일찍 자리에 눕는 시늉을 요 며칠째 이어나가는 중이다.


 알람소리에 맞춰 눈을 뜬다. 그렇지만 눈은 떠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눈을 뜨고 싶다. 이럴 땐 실눈만 뜬 채 간밤에 쌓인 SNS 알림이라던지, 잡다한 기사를 읽으며 의식을 차리는 방법이 꽤나 도움 된다. 오늘 아침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코로나 블루 여파로, 수도권 내 2030 여성의 극단적 선택 잇따라...’

 오늘 아침, 눈 뜨고 처음 읽은 기사였다. 코로나 블루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면서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나는 기사를 읽으며 한참동안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 생활에 무지막지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덕분에 회식이라던지, 친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어중간하게 뭉쳐 추억팔이하는 자질구레한 모임이 전부 취소되었다는 건 이득이었다.


우린 기회가 된다면 언제나 혼자 있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드디어 합법적 혼자가 될 수 있게 되었는데, 왜 우울감은 더욱 심화되는 걸까.
 
 역시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 때문에 고통 받지만, 사람 없이 살지 못하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는 다시 원점이다. 결국 우린 사람과 잘 지내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만나거나 만나지 않거나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인간관계는 마음과 마음이 이어져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중요한 거다.


만나는 횟수로 친밀도를 정의하는 것은 사춘기 중학생 소년소녀의 인간관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절대다수는 여태 인간관계를 그렇게 정의해왔을 것이다. 그래서 강제로 만나지 못하게 된 지금,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는다는 것에 무기력해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이야기는 다시 원점이다. 결국 삶에서 사람과의 관계는 삶의 중심부로 끌려 들어올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만남이 불가능한 이 시국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인간관계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화날 땐 그냥 화를 내세요.’

 내가 감히 독자에게 드리는 솔루션이다.
 사회는 우리더러 맨날 참으라고 했다. 화가 나도 참으라, 불공평해도 참으라, 부당해도 참으라, 계속해서 참으라 했다. 그게 내게 남는 장사라고 했다. 자기계발서 베스트셀러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조장하는데 한몫 거들었다. 우리는 안다. 매일 TV에 나와 참으라고 말하는 그들이 사실 화가 제일 많다는 것을 안다. 자기들은 화 다 내고 우리보곤 참으란다. 말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참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화가 나면 화가 났음을 표출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세상은 좀 더 밝아질 수 있다. 다만 정도는 독자들 개개인의 판단에 맡기는 편이 좋다. 논제만 던지고 빠져버리는 것이 아니다. 감히 개개인이 특정 상황에 느끼는 분노의 크기를 타인이 짐작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화를 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화를 자꾸 쌓아두다 보면, 언젠가 그 화는 개인에서 세상으로 확장된다. 나는 ‘헬조선’이라는 말이 그렇게 탄생했으리라 짐작한다. 개인에게 느끼는 화를 책에서도, 뉴스에서도 계속 참으라고 하니 풀 때가 없어 세상을 향해 푸는 거다. 근데 이건 좀 무서운 일이다. 세상을 탓하다 그마저도 의미 없다고 느껴지는 날엔, 그 모든 화가 자신을 향하게 된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


 그래서 화를 내야 된다. 화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지금 시대에 봉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세상과 나라가 해준 게 없는데,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불공평한 사회인데, 봉사라니... 누구한테 도대체 봉사하라는 말인가.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카메라 앞에 서서 연말마다 연탄 나르는 게 봉사인가. 나는 저런 걸 하지 않았으니 나쁜 사람인가. 봉사는 가식이다.


 그럼에도 나는 ‘봉사’의 힘을 믿는다. 그래서 나도 봉사한다. 내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소란스럽지 않은 것만으로 봉사라고 생각한다. 내 말 한마디가 소란스럽지 않음으로써, 누군가의 하루가 평온했다면 그것도 나는 봉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먹고 살만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화를 내봤기 때문에 그렇다.’

 언젠가 개인을 향해, 세상을 향해 분노를 있는 대로 토해낸 적이 있었다. 그러고 내가 느낀 것은, 나도 세상에 별로 해준 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조금 부끄러웠다. 그래서 결심했다.


 앞으로 사는 동안 거창하진 않더라도, 꼭 그게 시간과 돈을 들여 티나게 하지 않더라도, 봉사해야겠다고. 우선 내 주변 사람들을 잔혹한 나로부터 보호하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봉사다. 나 때문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거나 망가지게 두고 싶지 않다. 오래도록 지킬 것이다. 나로부터 당신들을 말이다.
 이 모든 결심에는 화가 있었다. 그러니 낼 수 있는 만큼 화를 내보시라. 화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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