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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우 Oct 08. 2020

<나는 느린 사람입니다>

사는 게 열등하냐고, 삶이 내게 물었다

<나는 느린 사람입니다>

 두 시간째 수학 문제 하나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다. 뭐가 이렇게 어렵냐.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고등학생 때는 이과였고,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수능도 적당히 잘 봤고, 대학교 졸업할 때 학점도 평균 이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고등학교 문과생 풀라고 만든 9월 모의고사 마지막 문제를 못 풀어서 두 시간째 씨름하는 중이다. 아, 내가 대체 왜 이런 조잡한 문제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씨름하고 있는지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다.


 오늘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읽으려고 어제 저녁에 서점가서 사온 시집은 표지 한 장 못 펼쳐봤다. 이따위 문제를 만들어서 내 독서시간을 잡아먹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다 민원 전화라도 할 요량으로 네이버에 접속해 그들의 회사 전화번호를 검색하다 그만뒀다. 내 전화 한통에 올해 수능문제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내년 수능문제가 바뀌는 것도 아닌데, 아쉬운 소리 해봤자 나만 손해다 싶어 그만둔다. 아, 난 이런 순간마다 내 자신이 초라하다. 나이가 드는 것 같단 말이다. 옛날엔 불의를 보면 뚝심있게 저항하던 나였으나, 나이가 드는 건지,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미리 단정지어 버린다. 근데 난 아직도 문제 안 풀었네... 여기까지 써놓고 풀고 올게요.

 (풀었다!)

 나는 글쓰기가 직업이지만,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쳐 밥을 먹고 산다. 가끔 학교나 도서관 초대를 받아 강의를 하기도 하지만, 일정하지 못한 그 수입으로는 삶을 연명할 수 없어 학원에서 수학 가르치는 일을 여태 그만두지 못했다. 나는 내가 수학선생님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밖에 나가서 작가라고 말하고 싶은데, 누군가 내게 무슨 일 하냐고 물으면 먼저 입에서 뱉는 말이 수학선생님이었다. 나는 왜 작가라고 떳떳하게 말하지 못했을까. 그렇게 집에 돌아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뒷맛이 씁쓸했고, 그림자는 어깨가 푹 쳐져 있었다.
 
 나도 슈퍼스타가 되고 싶었다. 집에서는 함부로 앉아 있지도 않는다는 어느 유명작가처럼, 오전에는 누워서 책 읽고 오후 늦게 읽어나 점심 한 술 뜨고 책상에 앉아 글을 실컷 써보고 싶다. 그렇게 해도 생계에 지장이 없다면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글은 쉽게 밥이 되지 않고, 덕분에 하루는 쳇바퀴 돌듯 계속 돌아야 한다. 오전에 일어나 글 한 줄 써놓고, 서둘러 지하철에 올라타야 한다. 책은 이때밖에 읽을 시간이 없다. 학원에 도착하면 돈까스 도련님 도시락으로 간단히 점심을 먹은 뒤, 오후에 있을 수업준비를 해놓고, 제 자식 성적 안 오른다는 학부모의 민원을 다 견뎌내고 나면 서둘러 수업 들어가기 바쁘다. 4시부터 시작되는 수업은 10시가 되면 끝이 난다. 서둘러 학원 문을 단속하고 지하철역까지 뛰어가면 10시16분 지하철을 간신히 탈 수 있다. 50분에 내려, 11시에 헬스장에 도착하면 12시에 문 닫을 때까지 운동할 수 있다. 그것도 눈치 보여 45분쯤엔 나가줘야 한다. 집에 도착하면 12시10분, 씻고 소파에 앉으면 1시가 된다. 책 몇 줄 읽다 졸린 눈을 비비면 대게 1시50분, 나의 하루는 매일같이 밀도 있게 채워져 있다.


 나는 슈퍼스타가 아니다. 그래서 많은 노동을 견뎌내야 하며, 이 생활이 언제 끝날지 기약조차 없다. 그럼에도 이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눈물을 흘린다거나 재능 없이 태어났다고 내가 아닌 누군가를 원망하는 일도 없다. 다만 가끔 내 삶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더러 있는데, 대게 누군가를 많이 부러워할 때다. 집에 돈이 아주 많고, 학창시절부터 그렇게 애쓰며 살지 않는 친구가 하는 일마다 잘 된다거나, 지가 잘난 걸 자기도 알고 있을 때 내가 좀 초라하게 느껴진다. 이럴 땐 잘난 척만이 답이다. 생각 주머니를 뒤져 내가 그놈보다 잘난 거 하나쯤 꼭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방안에 혼자 꺼내놔야 한다(남들 앞에서 꺼내면 외톨이 된다). 소리 내서 내가 잘났다고 얘기도 좀 해줘야 한다.

 나는 키가 크다. 키가 186cm다. 어린 시절에 성장에 관해서 단 한 번도 고민해본 적 없다. 재수 없더라도 좀 들어주시라. 이건 나의 자존감을 위한 일이다. 그 녀석이 돈이 아주 많아도 키는 못 산다. 키는 성형수술로도 고칠 수 없는 타고난 재능이다. 글로 쓰고 나니 더 뿌듯하다. 나 좀 힘들게 살아도 괜찮겠다 싶다. 왜냐하면 키가 크니까...


 신은 내게 큰 키를 준 대신 다른 재능을 모두 앗아갔다. 나는 배움에 있어 언제나 느리다. 수학선생님이지만, 다른 선생님들처럼 문제를 빨리 풀지 못한다. 솔직히 말하면, 시간 내에 다 못 풀 때도 종종 있다. 글을 쓰고 있지만, 단 한권의 책으로 대박 나는 일은 없었다. 오늘까지 4권을 출판했지만 걔 중에 좀 잘된 책도 있지만, 대체로 길 가던 사람 잡고 물으면 모를 가능성이 높다. 유튜브가 대세라고 누가 그랬다. 대충해도 1만 명은 거뜬하다고 했지만, 오늘까지 41명만이 내 채널을 구독하고 있다. 그 중에 가족, 친구 몇 명 빼고 나면 30명 정도 남겠다. 그럼에도 괜찮다. 나는 원래 느린 사람이다. 더러 모든 면에서 느리다는 것이 나의 인내심을 많이 요구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난 키가 크니까. 나는 키가 크다! 오늘 글은 기승전 큰 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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