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의 가치를 돈으로 저울질 하려는 태도

비밀; 사랑할 때 우리가 감추고 있는 속마음

by 박철우

선물의 가치를
돈으로 저울질 하려는 태도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찍은 영화를 좋아한다. 태평양을 면하고 있는 해변과 그 속의 청춘의 열기도 멋이라면 멋이겠으나, 정작 내가 캘리포니아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저들이 일상에서 내뿜는 ‘sweet’함 때문.


집집마다 커다란 차고지를 품고 있는 주택, 마당에는 사람의 손길이 자주 닿은 흔적이 역력한 매끈한 잔디, 그 집에는 각각 7세, 5세쯤 되는 딸, 아들이 다정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저녁시간이 되면 아빠는, 주방에서 요리하는 엄마 뒤에 가 백허그를 하고는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고, 서로에게 달달한 표현을 잘도 주고받는다(아주 한국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설정이다). 깊은 밤, 자꾸만 졸음이 쏟아지는 딸아이를 안아, 인형 가득한 방 침대에 눕힌다(영화에서 아버지가 할 일이 좀 많다). 마지막으로 사랑스런 딸의 이마에 굿나잇 키스를 보냄으로써 캘리포니아 중산층 가정의 하루는 마무리 된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기라도 하면 그들의 ‘sweet’함은 배가 되어 나의 심장을 낯설음에 빠뜨린다. 각자 준비한 선물을 트리 아래 숨겨두고는, 저녁 식사 후에 선물 교환식을 갖는데, 어느 누구도, ‘뭘 이런 걸 준비했어.’라는 말로 예의 차리지 않는다. 박스의 크기나 포장지 상태를 떠나서 선물이어서 벅차오름을 느끼고, 고르는 동안 나를 생각했을 마음이 화사해서 감동 받는다. 선물상자를 받아드는 때, 5세 남아조차 포장을 뜯기 전부터 옆 사람의 선물박스 크기와 자신의 것을 비교하지 않는, 그들의 선물 교환식은 모난 곳 없이 아주 매끈한 일상이었다.

표현의 풍만함이 어려서 내겐 꼭 낯설음이었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통 큰 청바지를 입고 뒤로 반쯤 누운 자세로 타는, 오토바이를 타고 싶어 했고, 여유가 된다면 스킨스쿠버 장비를 매고 바다에 젖어보고 싶다고도 하셨다.
숫한 소망 가운에 청바지 입는 것조차 못하셨지만, 그의 마음에 낭만이라는 꽃 한 송이가 심겨져 있었음은 분명해보였다.


그런 아버지는, 두 분의 결혼기념일 또는 어머니의 생일이 되면 종종 꽃을 사서 들어오셨는데, 새빨간 장미는 현관문 열기 전부터 문전박대를 당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돈으로 바꿔온나.”
당시 삶의 무게가 그러했겠으나, 꽃을 받고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딨으며, 또 그 마음을 알면서도 머쓱해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있겠는가.


표현은 마음을 현실 너머의 깊은 진심과 만나게 하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이기에, 어려서 나는 두 사람이 선물 앞에서 조금 더 끈끈해지길 바랐다. 화폐가치 이상의 따듯한 마음이 선물에서 묻어나도록 말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사진기가 흔하지 않던 때, 꽃 사진을 찍는 취미가 있었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은 여러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어디에 꽂혀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하지만, 기념일을 앞두고 서랍을 뒤져보는 거다. 인생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얻어걸리기도 하거니와, 꽃 사진은 못 찾았을지 몰라도, 그 과정에서 옛날에 아내와 남편, 두 사람만이 가정이던 시절, 어느 사진관에서 찍은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한동안 가만히 사진을 들여다본다. 이내 펜을 꺼내들고, 연애시절 이후로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손 편지를 쓰는 거다. 그것도 사진 뒤편에다 말이다.


엄마 생일날, 퇴근길에 자식들 학용품 살 때다 들어가봤던 문구점에 홀로 들어간다. 편지를 써둔 사진을 포장하기 위해서다. 남자친구에게 보낼 편지지를 고르기 위해 북적이는 여중생 옆에서, 리본 달린 예쁜 편지 봉투 하나를 고르고는 부끄러움에 서둘러 계산하고, 차 안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자켓 안주머니에 넣어둔 사진을 꺼내 어디 구겨진 데는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 뒤에, 방금 사온 예쁜 봉투 안에 사진을 담고는 집으로 향한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식탁에는 아내와 자식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식탁 한 가운데는 장보고 돌아오는 길, 아내가 직접 사들고 왔을 자신의 생일케이크가 놓여져 있다. 올해도 변함없이 크라운베이커리표 ‘화이트 초콜릿 케이크’. 남편은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왔으면 자켓 벗고 어서 앉으라는 아내. 남편에게 따듯한 국을 떠주려고 약불에 올려둔 냄비를 열고 미역국을 뜬다. 매일 보는 그 모습마저 오늘은 더욱 안쓰럽다.


케이크 먹을 생각에 신난 막내는, 누나들이 초에 불을 붙이기 시작하면, 쪼르르 달려가 주방의 불을 끈다. ‘생일축하합니다’ 노래를 부르고, 얼른 초를 끄라고 자식들은 재촉하지만, 엄마는 다 같이 초를 불자는 제안을 한다. 그리하여 촛농이 케이크 위로 세 방울 떨어지고서야 주방은 암전 상태가 된다.


불이 켜지고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아내는 서둘러 밥 먹을 준비를 하느라, 케이크 컷팅에도 무관심하다. 반찬을 다 내어, 식탁에 차리고서야 자리에 앉은 아내, 컷팅부터 하라는 자식들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케이크를 다섯 조각으로 자르기 시작한다.


남편은 자켓에서 언제 카드를 꺼내야 하나, 마른 침을 삼키며 타이밍을 재고 있다. 역시 엇박자다. 모두의 관심이 케이크로 쏠려,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순간에 자켓 주머니를 뒤적여 카드를 꺼내고는 아내 쪽으로 손을 뻗는다.


아내는 남편의 뻗은 팔을 보고는, 놀람도 기쁨도 아닌, 자기도 무슨 기분인지 알 수 없는 밍숭한 기분으로 봉투를 받아든다. 순간 아이들의 시선이 카드로 쏠리기 시작하고, 돈 십만 원 들어 있기엔 너무 작고 알록달록한 카드 봉투를 여는 아내. 버거운 삶을 사느라 기억 속에 사라졌던 사진 한 장을 보자, 아내의 마음속에서도 뜨거운 것이 역류하기 시작한다. 식탁 조명을 투과한 사진 뒤로 촘촘한 글자들이 보인다. 아내는 사진을 뒤집어 든다. 역시나 기억 속에서 잊혀졌던 남편의 오래된 글씨체를 알아보고는 더 이상 뜨거운 것을 참지 못하고 눈에서 쏟아내기 시작한다. 아내가 울었다. 시공간을 잊고서 울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울음을 그친 아내는, 남편 목을 와락 끌어안는다. 처음엔 입맞춤을 하려고 했으나, 안기자마자 또 흘러나오는 눈물을 어찌하지 못하고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한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보며 지나온 세월에 대한 미안함을 느낀다. 아이들은 식탁에 차려진 어떤 음식도 손대지 않고, 자리를 일어나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날 밤, 남편과 아내는 타임머신을 타고, 모든 감정이 새로웠던 시절로 돌아간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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