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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우 Dec 15. 2020

<크림빵 예찬>

사는 게 열등하냐고, 삶이 내게 물었다

<크림빵 예찬>

내가 사는 흑석동에는 오래된 빵집이 하나 있다. 가게 이름도 흑석제과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동네이름 뒤에 ‘제과’를 붙여 이름 짓는 빵집이 동네마다 있었다. 용호동에 가면 용호제과가 있고, 내동에 가면 내동제과가 있는 뭐 대충 그런 식이었다. 그런 빵집들은 대개 이름보다는 거기 빵집, 저기 빵집으로 지칭되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실제로 자주 찾는 사람들도 빵집 이름을 모르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빵집들이 자기 동네 이름을 버리고, 외국 동네 이름을 빌려와 가게 이름을 짓기 시작했다. 용호동에는 용호제과가 사라진 자리에 몽마르뜨가 생겼고, 내동에는 파리바게트, 상남동에는 크라운 베이커리가 생겼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지금, 성수동에서 내가 자주 가는 빵집 이름은 ‘아꼬테 뒤파르크’다. 이름이 너무 어려워서 주입식 암기는 진작 포기했고, 1년 정도 뒤에 자연스레 외워지게 되었다.


 냉면집, 국밥집, 삼겹살집, 토속적인 한식가게를 제외하면 한글가게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어진 지금, 빵집이 동네이름을 쓰지 않는다고 나무랄 일이 아니다. 다만 내가 불만인 건 동네제과에만 있는 특유의 한국적인 빵, 예를 들면 단팥빵, 찰떡빵, 완두콩빵 같은 빵들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일본 빵은 너무 짜고, 프랑스 빵은 또 너무 달다. 내 입맛에는 한국식 빵이 딱이다. 그중에서도 동네제과에 파는 크림빵을 가장 좋아하는데, 이를 두고 그게 무슨 한국식 빵이냐고 되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크림빵을 소울푸드 목록에 적어놓고 사는 사람으로써 그 차이는 명백하다.


서울에서 크림빵으로 유명하다는 빵집은 수소문해서 찾아다녀봤지만, 크림이 너무 고급지다. 유제품 맛이 특히 진하고 입안에서 크림이 녹는다는 표현을 실감하게 한다. 가격은 5천 원 정도가 평균적이다. 반면에 한국식 크림빵은 우선 가격부터가 2개 천 원이다. 심지어 내가 극찬하는 흑석제과에서는 얼마 전까지 3개 묶어 천 원에 팔았다. 이런 크림빵은 대개 기다란 모양의 빵에 배를 갈라 크림을 넣는다. 그리고 빵 위에 버터를 발라 살짝 굽는데 입 안에 빵을 넣을 때 이 버터향이 강하게 퍼진다. 크림에서는 진한 우유맛 보다는 아무 맛이 안 나는 크림 맛에 가깝다. 고급진 요즘 크림빵에 익숙해진 나는 ‘어? 이게 뭐지?’라는 생각으로 크림 속에서 크림맛을 찾으려고 빵맛에 집중하게 된다. 또 한 입 크게 베어물고 나면, 갈라진 배 사이로 크림이 밀려 나와 손가락에 살짝 묻는다. 그 다음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쪽, 나이 먹고 좀 그렇지만 대게 그렇게 한다. 나는 그것을 크림빵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며칠 전이었다. 3개 들이 크림빵을 사서 전날 두 개를 먹고, 하나를 남겨두었다 산책가면서 들고 간 일이 있었다. 아침 운동을 끝내고 벤치에 앉아서 빵과 물을 마시려고 했는데, 생수 뚜껑을 돌리다 그만 손에서 크림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땅에 떨어진 크림빵을 주워들었을 땐 모래와 먼지와 잡초가 크림에 뒤섞여 있었고, 나는 도저히 그 빵을 베어 먹을 수 없었다. 배는 고팠고, 크림빵은 다시 먹고 싶었다. 집 돌아가는 길에 흑석제과에 다시 들려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했지만, 가게 앞에 도착했을 땐 쉬는 날 없는 가게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지, 그런 생각에 걸음을 돌려 집으로 가는 도중 휴대폰에서 재난문자 알림이 울렸다.

‘10월 31(토)~11월.09(월) 흑석제과(동작구 서달로 162) 방문하신 분 중 코로나 증상이 있으신 분은 동작구 보건소에서 진담검사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물가상승에도 10년 째, 크림빵 가격을 올리지 않던 가게, 천 원짜리 크림빵 한 봉지 사도 덤으로 완두콩빵 하나를 챙겨주던 인심 좋은 가게도 코로나의 비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나보다. 나는 그 생각에 이유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그날 내가 느낀 죄책감은 갈 때마다 빵 한 봉지만 사와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코로나 예방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경각심 부재에 대한 미안함이었을까. 그날 내가 느낀 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열심히 살아도, 하나뿐인 크림빵을 손에서 떨어뜨리는 날도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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