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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도리 Apr 20. 2018

27세 청년, 쇼핑센터 만들기 [9장]

청년몰 오픈! 

He who would gather honey must bear the sting of the bees.  

꿀을 얻으려는 자는, 벌침을 견뎌야 한다.



나는 가슴에는 빨간 장미 한 송이 하나를 키운다. 


그것은 바로 '강화군수'라는 꽃이다.


5년 전 뿌린 그 꽃씨가 시들지 않고 남아 있다. 


장도리는 어쩌다, 그 꽃을 어떻게 품게 됐을까? 

장미꽃


대학교 졸업이 가까워졌을 무렵, 

나는 삶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다. 


주변에서는 모두 취업의 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모두가 한 곳을 볼 때, 나 홀로 걷는 길은 외롭고 두려웠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에 대한 두려움.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 틀렸는지 모르고, 

한걸음 앞이 절벽인지, 땅인지 모르는 두려움. 


특히, 함께 창업을 해서 살아남은 사람보다 

폐업해서 망한 사람이 더 많은 아수라였다. 


우리 집이 소위 말하는 '금수저'였다면

나는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보잘것없는 평범한 시골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정비공이었다. 


나는 바닥에 침을 뱉는 것 대신

하늘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대학교 졸업에 다가오자 

냉정하게 내가 가진 자원을 분석했다. 


스물세 살 청년이 가진 게 얼마나 많았을까?


비록 돈이나 금과 같은 실물 자산은 없었지만, 


출생, 성장과정, 인맥, 경험 등..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자산이라고 생각했다. 


무형자산을 모아보니 의외로 쓸만한 자원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천' 그리고 '강화'였다. 


강화도 태생의 촌놈, 국립 인천대학교라는 페널티는 

오히려 강화도에서는 장점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화군수'라는 키워드를 뽑아냈다. 

키워드가 바로 서니, 앞길이 명확해졌다. 


그 이후 나는 인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마다.

한 가지 잣대를 들이댔다. 


"강화군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선택이 도움이 될까? 

"어떠한 방향이, 강화 군수에 도움이 될까?"


군복무지를 선택할 때도, 주저 없이 강화도를 선택했다.

대학원을 정할 때도, 첫 집을 지을 때도, 커피숍을 할 때도,  청년몰도 마찬가지였다. 


결론적으로 나의 커리어는 인천, 강화에 집중됐다. 


훗날 내가 강화 군수에 출마할 때 


강화군 하점 태생

1. 인천대학교 졸업

2. 인천대학교 물류대학원 졸업

3. 강화도 공군 중대장 복무

4. 강화 중앙시장 청년몰 조성

5. 인천광역시 청년위원 같은 커리어가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까운 미래에 내가 인천의 아들, 강화의 아들이라고 소개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래서 나에게 강화중앙시장 청년몰은 중요했다. 

타이틀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청년들이 사업이 잘 되고, 웃으며 잘 살 수 있어야지 

전보다 나은 강화군이 된다고 생각했다. 


전국에 강화중앙시장 말고도 참 많은 청년몰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난 이후에도, 내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전국 청년몰 중  1호점의 깃발을 꽂았다는 것. 


청년몰이 완성되고, 여러 가지 이벤트를 많이 기획했다. 


장재인, 브로콜리너마저, 크라잉넛, 제시 등 

행사만 하면 인산인해였다. 


고려산 진달래 축제에 청년팀을 보내기도 했다. 


각종 사은품을 나눠주고, 현수막, 포스터, 영화관 등에 광고도 했고, 그렇게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막상 개장을 하고 난 이후, 한 달에 한번 이벤트를 열거나

영업을 해 주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일들이 많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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