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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 Jun 08. 2021

흐름을 보려면 흐름에서 벗어나라

내 위치의 객관화와 두려움

사람은 같은 냇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때의 흐름은 다만 나아갈 뿐 되돌아오지 않는다.

꿈속에서 있으면서 꿈인 줄 어떻게 알고, 흐름 속에 함께 흐르며 어떻게 
그 흐름을 느끼겠는가. 꿈이 꿈인 줄 알면 그 꿈에서 깨어나야 하고 흐름이 흐름인 줄 알려면 그 흐름에서 벗어나야 한다
(출처 : 이문열 <삼국지> 내용 일부)




사람은 때에 맞는 옷을 입고, 때에 맞는 오락을 즐기고, 때가 되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때가 되면 아이의 부모가 되고, 때가 되면 죽는다. 어떻게 보면 인생의 간단한 흐름 공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냥 세월이 말해주는 데로 살아가면서 내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고 내 앞에 큰 암초가 있는지 폭포로 떨어지는지도 모르고 그냥 흘러가다가 시련을 겪기도 한다.



반백년을 살고 있는 나도,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요즘 가끔 든다. 돈 없고, 빽 없고 등등 그리 좋지 않은 집안에서 자란 내가 다른 사람이 하는 것 따라 하면서 그냥 살았다면, 지금 나의 모습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무섭기도 하다.


10대의 삶은, 다른 집안 아이들과 같이 그냥 그렇게 학교를 다녔다. 물론 중학교 때는 우유배달도 신문배달도 했지만, 라떼는 새벽에 까까머리 중학생이 신문 배급소에서부터 옆구리에 신문을 끼고 달리든, 자전거로 힘차게 가든, 난 100호, 85호 등등 몇 호를 뛰었다고 자랑하기도 했던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고등학교 때는 다른 친구들은 열심히 주간에 학교를 가고 야간에 학원이나 집에서 공부를 할 때, 나는 반대로 생활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주간에는 직장을 다녔고 야간에 학교를 나갔다.


내가 고등학교를 선택할 때는 단순한 목적이 있었다. 그냥 죽을 때까지 굶지 않을 수 있는 것, 그래서 공업고등학교를 갔고, 토목과를 갔다. 나는 토목과가 뭔지도 몰랐다. 어른들이 가라고 해서 갔다. 내 의견은 없었으니까. 그냥 "죽을 때까지 굶지 않고 밥만 먹으면 된다"라는,


고등학교 3학년 1학기가 넘으면, 공업고등학교에서는 취업반과 진학반으로 구분이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나에게는 상담을, 조언을 해줄 어른이 없었다. 그냥 혼자였으니까 내가 선택해야 했고. 선택에 결과도 혼자 고스란히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그때만 해도 고등학교 졸업이 기본이었고, 대졸자는 서서히 늘어가는 추세였다. 혼자 생각을 여러 번 하면서 내린 결정은 그것이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대졸이 기본이 되겠구나라는 생각.


실업계 고등학교 3학년은 진학반이 따로는 있지만 진학에 대한 수업은 별로 하지 않는다. 진학 상담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형서점에 가서 학력고사 과목별 서브 핵심 참고서를 구입해서 20일 정도 공부를 했고, 그리고 전문대를 가게 되었다. 그것도 토목과로. "죽을 때까지 굶지 않고 밥은 먹을 수 있으니"




20대 때 전문대학교 토목과의 삶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순간 내가 일했던 직장에서 나와야 했고, 나는 다른 직업이 필요했다. 납부금을 벌어야 하니까. 나의 지식으로 우리나라에 최초 24시간 편의점은 세븐일레븐이고 그다음은 미니스톱이 아닐까. 그 이유는 내가 광주 산수오거리에 있던 미니스톱 편의점에서 근무를 했으니까. 주간보다는 야간이 시급이 좋아서 야간에 근무를 했다. 당시 시급이 시간당 1,800원 정도 했을 것이다.


대학 생활의 낭만은, 학교 대운동장에서 남녀가 섞여 기타 치고 축구하고 족구 하고, 막걸리에 두부김치를 함께 먹으면 깔깔대고 웃고 소개팅, 미팅을 할 때, 편의점에서 일을 했다.


대학 학기 종강을 하면 다음 학기 개강할 때까지 방학이다. 그때 친구들은 여행 다니고 할 때, 나는 벽돌과 철근을 날랐다. 방학 때는 노가다 아르바이트가 최고였다. 한 달 넘게 일을 하면 납부금을 벌 수 있었으니까.


내 삶은 정말 삭막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이 세상에 뚝떨어졌고, 떨어진 곳이... 차마... 이루 말하지 못하는....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내 마음속에 각인이 된 사자성어가 있었다. "塞翁之馬"

지금은 죽을 정도로 힘들지만, 좋아질 거야라는 생각으로 어린 나이에 버텼다. 지금도 塞翁之馬를 가슴에 새기고 있으니까.




20대 군대를 갔다 와서 건설회사에서 근무를 했고, 여러 번 이직도 했고, 회사의 법정관리로 인해 정리해고도 되어보았고, 월급도 밀려봤고, 퇴직금도 바로 안 나와서 힘들어도 보았다. 20대 후반의 그때의 나는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 갑자기 40 중반의 나를 상상 속에서 보았다. 40대 중반의 내가 누군가에게 남루한 옷을 입고 돈을 빌리려고 아쉬운 소리를 하고, 회사에서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능력은 있지만 채용을 해주지 않는 그런 절박한 모습을, 그리고 결말은 종이박스를 힘겹게 줍기 위해 하루 내내 도로 위를 수레를 끌며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이때 나는 결심을 했다.




20대 후반의 나는, 180도로 진로를 바꿔야 했고, 월급도 밀리지 않고, 부도도 나지 않는 회사, 공무원, 그래 공무원이다. 1년간 한 번도 배워보지 못한 영어도, 국어도, 국사도, 형법도, 형사소송법도 배워야 했다.


이때만 해도 나의 영어는, "아이엠 보이, 유아러 걸"밖에 몰랐는데, 공무원 시험의 영어를 해야 하니... 쉽지 않은 도전이었고, 나에게는 1년 정도밖에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태의 자금뿐이었다.


나의 공부 목표는 한국어로 된 과목은 만점을, 영어로 된 과목은 과락만 넘자였다. 1년 후에 이것도 저것도 안되면, 그때는 서울 한강으로 가서 세 번째 다리 위에서 뛰자 (나중에 공무원 합격해서 부천에 살면서 서울을 갔는데, 그냥 세 번째 다리를 찾으려고 왔다면 많이 헤맸으리라, 다리가 그렇게 많은 줄 몰랐으니까)라는 생각으로 그냥 그렇게 부딪쳤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의 30대의 삶은 그렇게 공무원 인생으로 바뀌었다.




40대의 삶은, 다른 친구들 골프를 치고, 다른 친구들 외국여행 자주 가고, 다른 친구들 재미나게 살 때, 나는 그냥 평범했다. 어려서부터 돈만 벌어봤다, 그것도 쥐꼬리만큼 만한 돈을, 그래서 돈을 벌어서 크게 써본 적이 없고, 어려서 놀러 가 본 적이 없어서 어디를 가서 어떻게 노는지도 몰랐다. 한때 캠핑 붐이 불 때, 가보지 못했다. 내가 캠핑 대신 갔다면, 아이들과 함께 전국에 있는 공무원 수련원을 대상으로 여행을 가본 것 밖에 없었던 것 같다.


40대 초에 나를 아시는 어르신의 인생조언으로 시작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 3학년 편입을 시작으로, 학사, 석사, 그리고 40대 늦은 후반에 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내 삶은 그리 순탄치는 않았으니,


오늘 나와 동갑인 축구선수 유상철 님이 고인이 되었다. 다른 스포츠 스타와 같이 방송에도 나오고 재미있게 지낼 나이인데 하늘나라로 갔으니 참으로 인생 허무함이 느껴지기도 한 오늘이다.


어느덧 50대인 나는 내 60대 이후의 삶이 두렵다. 아직 완성하지 못한 게 있으니까. 그래서 보통의 50대 남자들이 하는 오락이나 삶의 즐거움을 함께 하지 않는다. 나는 아직 해야 할 미션이 있으니까 말이다.


20대 초반에 느꼈던,  내 40대 이후의 삶의 상상의 공포가, 지금은 60대 이후의 인생으로 바뀐 것이다.

내 인생의 흐름을 알기 위해 스스로 마음공부도 하면서 지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60대의 삶이 순탄하고, 무언가를 하려 할 때 내 능력으로 마르지 않은 돈의 샘에서 평탄한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나는 보았다.


나는 몇 번 보았다, 나의 미래의 삶을.


어려서부터 객관적으로 나를 보는 훈련이 스스로 되었던 것 같다. 나보다 훌륭하지 않은 사람 없고, 내 스승이 되지 않을 사람 없으니.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조심하고 존경하고 존중하면서, 살기 위해 노력했고, 나를 낮추고 객관적으로 내 행동을 보려고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나를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다른 사람보다는 조금 더 있는 것 같다.




자신의 꼬불꼬불 인생의 흐름이 어떻게 될지 보려면, 자신의 마음 밖에서 나의 흐름을 보아야 한다. 명상이든, 휴식이든 말이다.


그리고 내가 살다 보니 깨달은 것은, 塞翁之馬는 인생의 흐름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내 인생 역경을 미리 알고 내 가슴속에 각인으로 하늘에서 박아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흐름 밖에서 나의 모습을 지금 보면, 어릴 때 나를 부르는 호칭이 천대 시 하는 호칭으로 시작했다면, 어느 순간 지금은 교수님이나 박사님으로 나를 불러준다. 인생의 시작은 지하 3층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지상으로 나온 것 같다. 지상 몇 층인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나를 부르는 호칭의 변화는 어떻게 될지도 무척 궁금하고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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