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안사위(居安思危) : 시즈 더 모멘트

#기회 #공부 #노력 #야구

by 별하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냥 살아간다. 물론 일개미처럼 사느냐, 베짱이처럼 사느냐는 태어날 때 결정이 되기도 하지만, 살아가면서 주변 환경으로 인해 결정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마치 새로운 시작과 전환을 뜻하는 운명의 수레바퀴 10번 타로카드가 펼쳐지는 것처럼.


어느 누가 3루에서 태어났다고 한다면 행운일까 불행일까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3루에서 태어났으니 홈은 바로 앞에 있는 것이고, 뒤에 올라온 선수가 괜찮은 번트를 쳐도, 누군가가 1루타나 3루타를 쳐줘도, 아니면 홈런을 쳐준다면 3루에서 태어난 사람은 그냥 홈을 밟고 들어와서 평생을 편히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행운일까.


반면에 3루에서 태어난 사람은 1루타도, 번트도, 도루도, 홈런도, 데드볼도 전혀 경험이 없었으니 홈을 밟기 전에 아웃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웃이 되는 순간 또다시 3루에서 시작을 할 수 있을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알게 된 것은 3루에서 태어났어도 홈을 밟기 전에 아웃이 되면 다시 시작하는 지점은 틀려진다는 것이다. 절대로 3루는 아니다. 물론 홈에서 출발할 수도 아니면 1루에서 출발할 수도 있지만 3루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3루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웃이 되었을 때, 홈이든 1루든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굉장히 힘들 것이다. 삶의 경험이 없고 오로지 3루에서 태어나게 해 주신 부모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으니, 자신과 사랑하는 누군가를 지켜낼 자력구제(自力救濟) 능력도, 세상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초적인 의식주 해결을 위한 자력갱생(自力更生) 능력도 과연 있을까?. 물론 훌륭하게 해결할 능력이 있는 사람도 분명히 있긴 있을 것이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때론 돈만 있으면 되지 하지만, 돈은 어떠한 대가를 지불해야 다가오지 않나, 부모의 재물복으로 사는 자식은, 어느 순간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면 그 재물복은 사라지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평범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말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한다. 그럼 나에게 기회는 언제 올까라는 생각을 어린 나이 때부터 했다. 물론 어떤 이는 복권 당첨이라는 일시불로 커다란 행운을 받은 사람도 있지만, 주변을 잘 돌아보면 뭔가를 끊임없이 노력을 하던 사람들 중에 일부가 노력의 대가로 엄청난 기회를 맞이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물론 같은 노력을 해도 안 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인생을 야구로 비유한다면, 운이 좋은 사람은 바로 현역으로 야구장에서 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2군 소속으로 현역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하는 인생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아마 나는 2군 소속으로 태어났던 것 같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의무교육이었으니 졸업장을 따기 위해 그냥 그렇게 다녔다. 삶의 의미는 별로 없었다. 그냥 숨을 쉬면서 살아가니까 다른 아이들 하는 것처럼 다녔다. 매번 영어수업 때는 단어 쪽지시험을 봐서 틀린 수만큼 얻어터지고, 한문 수업 때는 한문 쪽지시험을 봐서 틀린 수만큼 얻어터지고, 왜 영어수업은 매일같이 하는지, 정말 원망스러웠기도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의 맷집은 좋아졌다.


고등학교를 결정해야 하는 때에, 초등학교 중학교 성적이 바닥에 맴돌고 있으니, 기술이라도 배워서 먹고살아라는 어른들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물론 이때 내 꿈은 있었다. 어느 지방에서 살던 나는 노래하는 가수보다 그 뒤에서 춤을 추는 댄서들이 멋있었고 댄서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지만,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어른들이 만들어준 내 미래를 향해서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토목과를 다녔던 나는, 일단은 일주일에 한 시간만 영어를 해서 좋았다. 더욱이 좋았던 것은 영어 선생님은 우릴 보지 않고 칠판과 아이컨택하면서 자기의 영어실력을 맘껏 뽐내다가 가셨다. 그러나 좋아하지 않았던 공학 수학을 해야 하니 곤욕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했다. 매시간이 공학 수학을 풀어야 하는데, 일단 좋은 것은 내 머리로 푸는 것이 아니라 공학용 계산기를 이용해서 풀기 때문에 공학 수학 공식과 계산기 작동법을 기계적으로 외워놓으면 되는 것이니까 잘 적응을 했다. 그러면서 토목 공학도로 서서히 변신했다.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때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 섰다. 취업반이냐 진학반이냐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 이때도 나의 미래를 위해 상의해줄 어른은 없었다. 오롯이 내가 내 인생을 결정해야 했고 선택으로 인한 결과에 대한 책임도 오롯이 내 몫이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우리나라 평균 학력이 고졸이었다. 그렇지만 대학 진학률은 계속 높아져가는 추세였고, 이때만 해도 전문대가 정말 많았다. 물론 대학을 가는 학생인구도 상당했으니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었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결정했다, 대학 진학으로」 고졸이 평균 학력이지만 점차 높아질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일단은 대학 졸업장은 따놔야 살아가면서 무시를 당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경야독은 계속되었다.


어느 날 취업반으로 현장에 나갔던 친구가 두 달 만에 학교로 복귀했다.


(나) “야, 너 취업 나갔는데, 뭔 일로 들어왔어”
(친구) “나 취업 나갔다가 손가락 잘릴뻔했다. 그래서 도망 왔어, 내가 토목 기술자로 나갔으면 건설현장으로 가야 하는데, 자개농을 만드는 데로 보낸 거야, 계속 조개껍질 자르다가 왔어, 씨발, 같이 일하던 아저씨들이 손가락 하나씩 없는 게 기본이야, 그래서 도망 왔어, 나도 대학이나 갈라고”


학력고사 세대인 나는 4년제 대학교 토목과를 지원해서 고사장에서 시험을 보다가, 2교시 마치고 점심시간 때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봤다. 많은 수험생들을 위해서 내가 양보해준다는 마음으로, ㅋㅋ


토목과가 있는 전문대로 들어간 나. 1학년 1학기만 마치고 군대를 지원해서 가려고 했던 나는 어떠한 동아리도 들어가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그런데 이것도 뜻대로 잘 안되었다. 국어 오리엔테이션을 맡고 계시던 교수님이 여러 명의 학교 선배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남자 선배와 여자 선배를, 그리고 말을 했다.


(교수님) “나는 학보사를 책임지고 있는 담당 교수입니다. 학보사에 지원하셔서 교내 기자로서 활동을 함께 하시면 많은 베네핏이 있으니까 지원해주세요”
(남자 선배) “저는 편집장입니다, 많은 지원 바랍니다”
(여자 선배) “함께 학보사에서 일을 하면 좋겠네요, 많이 지원해주세요”


일단 들아가면 어느 소속에 구속되어 내 스케줄을 누군가의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지만, 일단 군대를 언제쯤 가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별로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내 옆에 있는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가 학보사 여자 선배에 꽂혔다. 자기 이상형이라고 하면서, 모태 솔로를 탈출할 기회가 온 것 같다고 했다. 혼자 지원하긴 뭐하니 함께 해달라고, 밥을 산다고, 그래서 귀찮지만 같이 200자 원고지 다섯 장을 대충 쓰기 위해 함께 갔다. 어만 다리를 긁고 있는 친구를 위해서.


‘대학생활’이라는 주제를 주면서 글을 써서 제출하라는 미션을 받은 나는, 그냥 대충 200자 원고지 5장에 볼펜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 대학 생활의 좋은 기대도 나쁜 점도 마구 써가면서 대충 이까이꺼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내 친구는 정성스럽게 써가면서 추가로 5장을 더 주라고 하면서 써 내려갔다.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며칠 후 학보사 여자 선배가 강의실로 찾아왔다. 당연히 원고지 10장을 미친 듯이 써 내려간 친구를 찾을 줄 알았더니, 나보고 따라오라고 하는 것 아닌가, 오 마이 갓. 그렇게 나는 학보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글 쓰는 법을 편집장에게 배워갔다.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토목기술자로 건설현장에서 일을 했다. 도로 공사부터 교량공사, 아파트 단지 조성 택지공사 그리고 골프장 기초공사 현장에서 나름 기술자로 살았다. 토목 기술자로서, 자부심도 뿜뿜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의 앞날은 나로 인해서도 때로는 국운(國運) 환경으로 인해서 변할 수도 있는가 보다.


1997년 IMF를 만났다. 내 주변의 기업체는 줄도산이 나기 시작했고, 노숙자가 급격히 증가하던 시절이었다. 야반도주(夜半逃走)하는 가정도 많았고, 자살자도 많아서 장례식장이 꽉 차던 살벌한 시대였다. 반면에 국민이 단합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자발적인 국민들의 참여로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전설의 금 모으기 운동 말이다.


나는 또다시 선택해야 했다. 이때도 내게 현명한 조언을 해줄 어른은 없었다. 물론 이땐 내가 어른이었으니까. 안정적이고 부도가 나지 않고, 월급이 때에 맞게 잘 나오고, 퇴직금을 주냐 안주냐 하지 않는 그런 회사. 바로 공무원을 선택했다. 일단 회사에서 나온 퇴직금으로 생활비를 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버티자라는 마음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시작했다.


공무원 공부를 할 때 힘들었다. 특히 한국말이 아닌 영어란 놈이. 중학교 때 영어란 놈 때문에 내 맷집이 늘었는데, 이 원수 같은 영어를 해야 한다. 그것도 공무원 시험을 위한 영어니 '오 마이 갓'이었다.


be동사, have동사, 미래형 과거형 진행형 등등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글자들이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내가 아는 영어는 '아이엠 어 보이, 유아 럴 걸, 히이스 스튜던트'였는데, 그래서 20대 후반의 나이에 서점에서 중1부터 중3까지 완벽히 마스터 해준다는 기초 영어책으로 도서관에서 한 달간 씨름을 했었다.


물론 영어를 잘하지는 못했다. 어제 단어를 30개 외우면 오늘은 두 개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 등 영어는 나에게 늪이었다. 최후의 수단을 선택했다. 모든 공무원 시험의 과년도 영어 기출문제를 모았다. 그리고 외웠다. 그냥 외웠다. 그리고 시험을 봤다. 단어나 문장 해석을 버벅되긴 했지만 어떤 것을 답으로 찾으라는 지는 눈치껏 알았다. 과거형을 찾으라는 것인지, 동사를 찾으라는 것이지.


(학원 수강생) “형, 형이 공부한 영어스퇄이 토익 스퇄이야, 유형 찾는 거”
(나) “토익이 뭔데”


그리고 난, 공무원이 되었다.


지금 나는 내 인생을 뒤돌아본다, 과연 기회는 언제 올까, 기회라는 게 있는 걸까라고 생각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나에게 첫 번째로 온 기회는 토목기술자였을까. 지방에 있는 학원에서 토목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필기 공부를 해서 1차를 합격했고, 2차 설계 시험 통과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 돈을 모아 2차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전국에서 유일했던 서울 영등포에 있는 토목 전문 학원에서 1주일간 먹고 자면서 오롯이 설계 연습만 했다. 그리고 최종 합격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유일하게 나만. 그리고 토목 정규직 기술자로 나름 인생의 꽃을 피웠다.


좋지 않은 국운(國運)의 어두운 안갯속에서 내 미래의 안정적 생활을 위해 영어를 잘하지 못한 내가 공무원을 선택했을 때, 나름 기술자 선배나 친구들이 응원은 해주었지만 1년 후에 다시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어떤 자리를 줘야 되겠구나라고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고 말들을 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공무원으로 재 탄생했다. 모두들 축하해주었다. 물론 지금은 토목 기술자였을 때보다는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 나름 자식들에게 누군가가 ‘너 아버지 뭐하시노’라고 물으면 공무원이신데요라고 말을 한다고 하니, 그래도 나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나는 또 다른 도전을 한다, 아마도 토목 기술자의 삶으로 약간 회귀하는 부분으로,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다. 앞으로 미래의 삶을 위해서다.


서러운 학창 시절의 불안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다가 처음으로 토목 정규직 직원으로 10년 정도 안정적 생활을 했던 나, 그리고 토목 정규직에서 공무원으로 이직해서 지금까지 20년간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내 가족을 모두 지켜내는 삶을 살고 있는 나.


앞으로 공무원 생활을 언젠가 퇴직하게 되었을 때, 내 남은 인생을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자력(自力)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또 다른 공부를 하고 있는 나.


나는 내가 살아가면서 여러 번 기회를 만났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물론 기회는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면서 잡아가는 것은 아닐까라고 나는 정의를 내려보기도 한다. 거저먹는 기회라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처음부터 바닥에서 시작했던 나. 1루에서 아웃되면 다시 시작을 해도 그런가 보다 하고 가볍게 감내했던 나. 물론 힘이 무척 들고 시간도 많이 소요되고, 가끔은 '내 또래인데 저 사람은 벌써 저기까지 갔는데 나는 이게 뭐야' 하고 힘 빠질 때도 있지만, 가끔은 나보다 훨씬 빨리 올라갔던 사람이 갑자기 내 옆으로 자의든 타의든 미끄러져 내려가는 모습도 여러 번 보기도 했다.


비록 스스로 기회라는 분이 찾아올 수 있게 걸맞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가만히 입만 벌리고 있는 것보다는 기회가 찾아올 수 있게 스스로 만들어갈 때, 그때 기회라는 분이 스르르 찾아온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그렇다면 '어떤 환경을 만들어야 기회가 올 수 있을까요?'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경험을 통해서 나는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잘 생각해본다면 앞으로 미래를 어떤 방향으로 구상을 해야 할지가 조금은 보일 수 있음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내 인생의 세 번째 기회라는 분을 붙잡기 위해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기회를 낚기 위해 인생의 바다에 투망을 던져본다. 그리고 기회가 지나갈 때 잽싸게 잡아챌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회가 오는지 안 오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기회가 오는지를 미리 알려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의 삶을 설계해보면 분명히 보이는 게 있고, 희미하던 선명하던 보인 부분에 맞는 공부를 하고 시간을 투자하면서 준비하는 게 백없고 돈 없는 평범한 소시민이 돈이 별로 들지 않고도 기회를 잡고자 준비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주어진 세 번의 기회는 스스로 인생을 만들고 준비하는 자에게 내려준 인생의 선물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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