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삶의 의미
사람은 언제 죽을까. 생을 다 소진한 지친 심장이 멈춰 맞게 되는 죽음이 첫 번째 죽음이라면, 그 삶은 축복 속에 사그라지는 것이구나- 생각한다. 중학생 때, 치매 요양원으로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다. 요양원이라기보다는 격리소에 가까웠다. 감당할 사람이 없거나, 감당을 못하거나, 포기한 치매 환자들을 감당해주는 마지막 장소. 층마다 단단한 철문과 도어록으로 잠겨 있는 건물은 가운데 넓은 사각형 공간을 중심에 두고 양 옆으로 복도가 뻗어나가는 구조였다. 복도 양 옆으로는 최소한의 기구를 갖춘 화장실 -내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문이 내부를 다 가리지 않았다- 이 하나 딸린, 가구 없이 갈색 매트 바닥이 전부인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5-6 사람이 쓸 법한 넓이의 방에도 당연히 문은 없었다.
낮이지만 형광등을 켜지 않아 어두운 실내. 음울한 방구석에 무릎을 모으고 고개를 파묻고 있던 노인, 노인들. 그 장면은 뇌리에 깊게 남았다. 왜소해질 대로 왜소해져, 아이처럼 작지만 살아있다는 것 외에 생기(生氣)는 느껴지지 않는 형체. 아무 말도 없이, 표정도 없이, 움직임도, 반응도 없이 그저 작아져있던 분들. 그러나 멈추지 않은 시간. 그분들의 삶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죽음을 느꼈다고 생각했다.
친할아버지 댁에는 적으면 1년에 한두 번 방문한다. 커서는 더 못 가지만, 어렸을 때도 많아야 1년에 네다섯 번 방문했던 것 같다. 그런 탓에 나와 할머니, 할아버지 사이에는 이렇다 할 애정이나 기억이 없다. 언제가 한 번은 그곳에서 삶의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는 나를 맞아주실 때와 배웅할 때, 식사할 때는 제외하고는 안방에 누워계셨다. 불은 꺼져있고 작은 티브이만이 방을 밝히는 곳에서. 그저, 역시 작아지신 채로, 누워 계셨다. 귀가 어두우신 탓에 티브이 소리는 요란했지만 그것은 방과 존재에 드리운 침묵 속에 도리어 묻혔다.
다음 주에 내야 하는 과제가 있어 마음이 불편하고, 이곳에 오느라 주말에 보낼 여자 친구와의 시간을 미룬 것이 아쉽고, 빨리 집에 돌아가서 가장 좋아하는 카페 -일부러 드러낸 콘크리트 벽과 열대 식물의 조화가 세련되어 인기가 많은- 의 플랫화이트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그나마 얼마 전 이 곳에 무선 공유기를 설치해 유튜브라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거실에서 뒤척이던 어느 새벽,
하루 종일 닫혀있던 안방에서 할머니가 뒤척이는 소리. 거실 하나 가로질러 있는 화장실에 가는 것도 힘겨워 써야 하는, 요강이 내는 달그락하는 금속의 소리. 오히려 낮에는 들리지 않던 간헐적인 신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야만 했다. 내가 가진 것과 느끼는 모든 것이 없는 당신의 시간. 당신의 삶과 나의 삶은 다르면서 결국 같은가. 삶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