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본사는 투칸 Sep 24. 2021

모자수첩은 왜 모자수첩인가

일본에서 스웨덴 남자랑 애 낳고 기르는 이야기


임신 확인을 받은 뒤, 분만 병원에 첫 검진을 받으러 가기 전에 모자수첩을 받으러 구청으로 향했다. 모자수첩은 보통 임신 8주쯤에 구청에 가서 받아오라고 안내한다.


모자수첩(母子健康手帳, 모자건강수첩)이란?

한국에선 각 병원에서 산모수첩이란 걸 나눠주고, 거기에 진료 기록을 하고 초음파 사진도 붙인다는 것 같은데 일본은 구청에서 모자건강수첩, 이른바 모자수첩이란 걸 받아야 한다. 관공서에서 나눠주는 물건의 특성상 모자수첩은 한국의 산모수첩보다는 공적인 지위를 가지며 출산 전 정기 검진은 물론 출산 후 아이의 소아과 통원 시에도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구청에 가서 모자수첩을 받으러 왔다고 하면 건네주는 산더미 같은 서류를 쓴 뒤에 담당 공무원과 사회복지사를 만나게 된다.


서류에는 신상정보와 더불어 분만은 어디서 할 예정인지, 임신 기간 중~출산 후에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은 있는지, 현재 몸 상태와 마음 상태는 어떤지에 대한 내용을 묻는 질문 항목들이 있다. 외국인 산모의 경우 모자수첩의 언어를 선택하는 것도 가능한데, 한국어 버전 모자수첩이 절망적으로 못생겨서 나는 그냥 일본어 버전으로 신청했다.


서류를 제출하고 나면 사회복지사가 서류를 보며 간단히 상담을 한다. 이런 상담 제도는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상담 과정에서 가정환경이나 임부의 심신 건강 상태(몸 컨디션, 임신을 처음 알았을 때의 기분 등), 만약 일을 하는 중이라면 업무 중에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을 하진 않은지, 통근거리는 어떠한지까지 세심하게 파악하는 점도 좋았고, 그런 내용들에 맞춰서 앞으로 나라에서 직접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점도 만족스러웠다. 실제로 나는 나와 남편이 둘 다 외국인이고, 맞벌이 가정이며, 코로나로 인해 해외에 있는 가족들이 도움을 주기 힘든 점을 어필했더니 현 상황에 맞는 지원 제도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모자수첩과 함께 의료비 바우처도 지급받게 되는데 요코하마시의 경우 총 82,700엔어치의 바우처를 지급한다.


다만 이걸 맘대로 쓸 수 있는 건 아니고 4,700엔권, 7,000엔권, 12,000엔권 세 가지로 나눠져 있어서 병원에서 수납 시 바우처 책자를 제출하면 병원 측에서 알아서 ‘이번엔 수납금이 얼마 얼마이니 ㅇㅇ엔짜리 바우처를 쓰겠습니다’하고 알려준다.


한국처럼 고운맘 카드에 한 방에 다 넣어주고 ‘알아서 쓰세요~’라는 편리한 구조가 아니고 수납 때마다 바우처에 이름, 주소, 모자수첩 번호 등등 신상정보를 수기로 써서 내야 하는 몹시 화가 나는 제도이긴 하나, 일본에 3년쯤 살다 보면 이 또한 그러려니 하게 된다.


내가 이걸 받는 날이 오다니
그리고 매뉴얼의 나라답게 문서들도 와장창 딸려옴


모자수첩은 왜 모자수첩인가?

모자(母子) 건강수첩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수첩은 엄마의 건강뿐만 아니라 태어난 후의 아이의 건강상태 기록, 예방접종 기록 용도로도 쓰이는데, 전체 구성을 보면 산모 파트보다는 아이 파트가 훨씬 볼륨이 크다.


그래서 최근 일본에선 이 수첩의 이름을 ‘모자수첩’에서 ‘친자 수첩(親子手帳, 친자는 모자보다는 ‘부모+아이’의 뜻이 강하다)’으로 바꾸자는 움직임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실제로 일부 지자체에서는 이런 움직임에 발맞추어 친자 수첩(親子手帳)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재밌는 건 이런 움직임을 엄마보다는 아빠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것. 오히려 야후 뉴스 댓글에서 엄마들이 모자수첩은 아이뿐만 아니라 엄마 건강을 기록하는 수첩이기도 한데 왜 이걸 친자 수첩으로 바꿔야 하냐며 거부감을 보이는 분위기였다.


일본은 한국보다도 모성신화가 뿌리 깊게 박혀있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양육에 있어서 ‘엄마’에게 부가되는 짐이 굉장히 무거운 편이고, 임신/출산에 있어서도 산모의 편의를 고려하는 점이 한국보다는 부족하다고 느꼈고, 보육원이나 학교 등지에서도 엄마를 갈아 넣어 만드는 행사가 여전히 많다.


나는 이런 일련의 분위기는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모성신화 환상’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모자수첩 이름 변경을 놓고 거부감을 보이는 엄마들의 댓글을 보며, 이 나라 엄마들은 ‘모성신화 환상’을 짐이 아닌 특권이라고 여기는 걸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깨닫고 컬처쇼크를 받았더랬다.




그런 와중에 모자수첩 표지에는 보호자명을 쓰게 되어있는데, 이걸 보고 ‘여기에 엄마 이름만 쓰면 만약에 아빠가 아이를 병원에 데려간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래서 나는 보호자명에 나와 스웨덴 남자의 이름을   썼다.


그리고 이에 대해 스웨덴 남자와도 집에서 이야기를 나눠보았는데  역시도 이게  ‘모자수첩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다. 임산부/산모의  상태 체크를 포함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모든 과정은 엄마의 솔로 플레이가 아닌 부부의  플레이라는 점에서  수첩의 이름은 ‘친자 수첩  적절하지 않냐는  우리 부부의 의견.


뭐, 아이를 임신해서 낳고 기르는 것이 ‘특권’이라 칭하는 게 옳은가 아닌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렇다면 이 ‘특권’은 엄마가 독점하는 건 옳은 것인지? 애는 엄마 혼자 못 만들잖아요?

매거진의 이전글 내 아이를 받아줄 산부인과를 찾아서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