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 보신 적 있으세요?” 웬 낯선 남자가 당신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은 그 남자를 경계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돌린다. “아... 모르시는구나, 그럼 경마는 아시죠?” 낯선 남자가 당황하며 제차 질문한다. 당신은 경마를 잘 모른다고 답한다. “아하 그러시구나, 뭐 별거 아닌데요. 이 경마라는 건 평균적으로 12마리에서 14마리 말들이 미친 듯이 뛰어요. 그중에서 누가 먼저 들어가나 시합하는 건데… 여기서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그 남자가 다시 질문했다. 당신은 또 고개를 저으려다 계속되는 무지함에 수치를 느끼곤 아무거나 집어 답을 해보았다. “경주.. 말.. 인가요?”
그 남자는 당신의 말을 듣고 조금은 웃은 다음에 말을 이어갔다. “아하-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요. 뭐, 엄청 틀린 말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거든요. 땅이 중요하느니, 결국에는 경기장이 중요하다니, 아니면 상금이나 경마를 보는 사람들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쪽처럼 말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들 합니다.
근데요.. 결국 중요한 건 그 중요한 말을 모는 ‘기수’에요. 모르셨죠? 왜냐하면 생각을 해봐요, 세상에서 제일 빠른 말이라고 해도 그놈들은 결국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몰라요. 눈가리개를 끼고 기수가 가라는 곳으로 발만 움직였으니까 지들이 뭘 알겠어요.”
“익숙하죠?” 갑자기 그 사람의 어투가 달라졌고 당신은 알 수 없는 소름이 돋는다. 그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고는 당신을 몰아붙이듯 이야기한다. “뭘 또 놀라고 그러세요. 당신 꼴이 딱 그 모양이잖아, 어디로 달려야 할지도 모르는 기수 잃은 말.”
당신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난다. 불쾌한 꿈이었다. 하지만 그 꿈속의 남자가 했던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라는 사실에 당신은 얼굴을 붉혔다. 그렇다, 당신은 기수 잃은 경주마다. 당신은 평생을 경주마로 살아왔다. 연애를 할 때도 그러했으며, 운동을 할 때도, 공부를 할 때도, 시험을 칠 때도 당신은 달렸다. 아니, 사실은 그저 발만 휘저었을 뿐이지만 말이다.
당신은 등 뒤에 올라타 있는 기수의 존재를 잊은 채, 경주에서 얻은 ‘1착’ 메달을 순전히 본인의 능력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꼴이 어떠한가, 당신은 지금 기수를 잃었으니 경마장에서 시합을 뛸 수 없고 설령 뛴다 하더라도 어디로 달려야 할지 모르지 않는가. 이제 경마에 나가지 않는 당신은 도축용으로 길러진 말이나 관상용 말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 당신의 마음속에는 그들과 다른 종자를 가졌다는 하등 쓸모없는 자부심이 있겠지만 지금의 당신은 그들과 같다.
경기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으니 당신은 종마로도 쓰이지 못할 것이다. 운이 좋다면야 제주도에 끌려가 차 대신 친환경 탈것이 되어 경주마였던 그때를 회상하며 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기뻐하지 말아라, 제주도는 말도 먹는다는 것을 심지어 당신의 연골까지도 말이다.
당신은 얼마나 빨리 들어갈지를 생각했어야 하는 게 아니라, 어디로 뛸지를 생각했어야 했다. 그리고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또 왜 뛰어야 할지를 생각했어야 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당신과 같은 말들은 얼마든지 널려 있으니까. 수많은 말들이 ‘어디로’, ‘왜’, ‘어떻게’ 같은 의문사를 머릿속에서 지우면서 그저 발만 휘젓는다. 1등만 하면, 이 경기만 이기면, 저 앞말만 젖히면, 그렇게 이기면 이기면 이기면 이기면 이기면 이기면 이기면 이기면 이기면 이기면 이기면 이기면 이기면 이기면 이기면 이기면 이기면 이기면 이기면 이기면 이기면….
그렇게 당신처럼 기수도 잃고 갈 곳도 잃는다. 모두가 1등이 될 수도 없는 데, 당신은 그리고 그들은 왜 그렇게 죽어라 달릴까, 혹시나 몰라서? 아니다. 절대 그럴 리는 없다. 당신도 잘 알지 않는 가. 당신이 관상용 말이나 도축용 말을 보면서 들었던 그 생각처럼, 1등이 되는 말은 1등만 했던 엄마 아빠의 종자를 받은 그런 말만 1등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명제다. 그럼에도 당신은 달린다.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서? 아니면 그 사실을 알고도 모른 채 당장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혹은 뭐든 해보기 위해?
아니다. 당신은 이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냥 달리는 법만 배웠으니 어떻게 당신이 뛰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어떻게 다른 곳을 보겠는가. 그들이 당신의 눈조차 가리면서 일평생을 달리기만 시켰으니 말이다.
자, 저는 다 알려드렸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달리실 건가요? 이번엔 기수가 있으리라 착각을 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