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고
얼마 전 ‘너는 사랑을 해본 적 있냐?’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나는 조금 머뭇거렸다. 나는 정말 사랑을 해본 적 있을까?, 사랑이 뭘까? 와 같은 의문들이 대답 대신 머리를 맴돌았다.
많은 미디어에서 사랑을 주제로 하는 영화나 음악이나 책 등 수도 없이 많은 작품이 있다. 이러한 것은 인간이 문학 활동을 하는 순간부터 쭉 이어져 왔던 것이다. 현실에서도 많은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며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혹은 그랬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사랑하는가, 혹은 사랑해 본 적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조금은 어색하거나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같이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사랑, 사랑의 어학적 정의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거나 즐기는 마음, 그리고 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 이것이 어학에서 정의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다. 인간이 가지는 불완전함을 해소하기 위한 합일의 감정, 그리고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 형제애, 모성애, 성애, 자기애, 신앙 이 중에서 아마 그 질문에 담긴 사랑은 성애일 것이다.
성애란 무엇일까, 우선 성애란 에리히 프롬은 남녀 간의 결합하고 자는 욕망에서 비롯한 정서적 육체적인 사랑으로 정의한다. 우리가 흔하게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성애인 것이다. 이러한 성애는 앞서 언급한 형제애, 모성애와 달리 독점욕을 가지며, 배타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성애가 단지 남녀 간의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사랑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사랑을 해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사랑이 성숙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성숙한 사랑을 위해 3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친밀감, 정열, 헌신 이렇게 세 가지 조건이 만족하여야 지만이 완전한 성숙한 사랑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친구가 만약 나에게 성숙한 사랑을 해본 적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당연히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이전에 해왔던 사랑은 도취적 사랑, 낭만적 사랑, 얼빠진 사랑 등 요소들이 하나씩 결여된 사랑을 해왔다. 하지만 그런 것이 사랑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 당시 느꼈던 혹은 느끼고 있는 이 사랑의 감정은 그 순간만큼은 나보다 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나의 안위보다는 그 사람의 안위를 생각하며, 그 과정 속에서 더 없을 행복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이 앞서 말했던 성숙한 사랑이며, 좋은 사랑이라고는 말하지 못할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상처와 슬픔 그리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던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기에 우리는 성숙한 사랑을 해야 한다.
‘당신은 사랑을 해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전에 우리는 우선 ‘나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좋은 사랑과 성숙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나 모두 우선 성숙하고 좋은 사람이어야 하며 사랑을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일반적으로 사람은 사랑에 대해 내가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고 한다. 즉 사랑하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 혹은 부재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인간의 불완전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한 합일에 의한 것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가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사랑을 배워야 하며 그 과정 속에서 좋은 사랑을 줄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 나와 다른 성별과 만나며 육체적인 부분이든 정신적인 부분에 대해서 이해하며 그 과정 속에서 성장한다. 사랑은 단지 외로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혼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깨달을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알며 정서적인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사랑은 그러한 과정 속에서 크나큰 행복을 가져다준다. 삶의 윤기를 부여하며 삶에 대한 애착을 형성하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를 만든다.
그렇다면 당신은 사랑해 본 적 있는가? 혹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