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론(論)

수감번호 6174의 수기

by 박겸도
이 기록은 수감번호 6174의 침대 위에서 발견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아무런 수정도 하지 않고 발표한다. 이 글에는 제목과 날짜가 적혀 있지 않으며, 그는 사후에 조현병을 진단받았음이 밝혀졌다.

날계란을 먹어본 적은 있는가. 혹은 맞아본 적은 있는가. 1월 25일 9시 58분 관상봉합(Coronal suture)에서 정확히 2.35cm 떨어진 전두골에 52g짜리 중란이 강타한 적도 없는가? 그렇게 머리를 가격한 날계란의 비릿함을 맛을 보지 못했다면 축하한다. 당신도 머지않아 이 짜릿한 축포를 경험하게 될 테니 말이다.


내 이름은 6174번이다. 나는 이 이름이 좋다. 6174는 서로 다른 두 개 이상의 숫자로 이루어진 4자리 수를 가지고 정렬된 수의 뺄셈을 반복하면 도달하게 되는 수다. 내(네) 자리에서 무슨 짓을 해도 여전히 여전히 6174라는 수로 귀결되는 것이 구차한 설명 없이도 온전하게 나를 대신한다. 이보다 탁월한 이름이 있을 수 있을까!(다소 과격한 글씨체로 작성되어 있지만 아마 상이한 내용으로 보인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나의 모든 행동이 정해진 다음 행동을 위한 필연으로 작용한다면, 왜 엄마는 내게 날계란을 던지지 않았을까. 나는 이 생각으로 10일 치의 무료함을 살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정확히 254.5개를 더 사면된다. 그러나 반복되는 생각은 단물 빠진 껌처럼 씹히지 않는 고무라는 인상만을 남기고 효용을 잃게 된다. 그리고는 ‘퉤’하고 누군가에 의해 버림받는다. (실제 껌자국이 남아있다)


나는 버려진 그를 추모하기 위해 또 다른 생각을 찾는다. 언젠가 모두가 죽는다면 왜 미리 자살하지 않을까. 나는 이 생각으로 평생의 무기력함을 빌려야 한다. 그것도 연 20%짜리 이자와 함께 말이다.(법정 최고 이자율이다)


지금까지 행해진 죽음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역설적으로 모두 그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우리의 죽음을 향한 무용한 꿈틀거림을 멈출 필요가 있다. 지렁이는 비가 오면 숨을 쉬기 위해 밖으로 나온다. 그러나 비련하게도 변덕스러운 소나기가 그치면 바싹 구워진 채로 숨을 거둘 뿐이다.


눈이 없는 지렁이는 화창하게 날이 갠 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심지어 요즘같이 길가에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이 즐비한 이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결국 죽음을 피하기 위한 그 모든 행동은 ‘죽음’이라는 정해진 운명에 도착하게 할 뿐이다. 만일 해와 아스팔트를 피해 ‘오늘’을 살아도, ‘내일’과 ‘모레’ ‘글피’에는 살 수 있을까.


살기 위해 구차하게 피하는 것 밖에 없고 결국 피하지 못한 때가 올 때 우리는 나의 무능으로 인한 죽음이 아닌 해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나의 이 ‘지렁이론’이 끝나고 나면 모두 재미있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내가 본 수많은 표정 중 엄마의 표정을 가장 좋아한다.(엄마의 표정이 그려져 있으며 아래에는 정갈한 글씨로 mydriasis, Lid retraction, Mandibular prolapse라고 적혀 있다.)


나는 구원자였다. 어머니를 구하기 위한 치열한 사투를 벌인 열사였다. 그날은 월말이었다. 카드값과 세금 청구서들이 기어이 그녀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그녀가 내쉰 한숨이 그 청구서를 지워내진 못했다. 나는 그런 나의 엄마를 구원할 의무가 있었다. 나는 지렁이의 그리고 엄마의 고통을 이해한다.


"구원"하는 작업은 매우 까다롭다. 먼저 외경동맥을 가르고 쇄골하동맥이 위치한 곳으로 칼을 교차하며 다시 위로 올라가 외경정맥과 내경정맥을 끊어내었다. 얼굴로 뿜어져 나오는 다량의 혈류로 앞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멈출 수 없었다. 혈액이 혀에 닿아 아릴 정도로 씁쓸한 쇠맛이 맴돌아도 그쳐서는 안 되었다. 본디 "구원"의 과정에서 고통은 필연스럽기 때문이다.


헌신한 용사의 최후는 언제나 비참하다. 나는 엄마를 "구원"했음에도 나를 "구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머니를 "구원"한 후, 피칠갑이 된 거울 속에서도 나를 응시하며 그녀를 품에 안고 있던 그 용사조차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 검붉은 액체로 점철된 그 붉은 허상도 끝내 나를 외면했다.

나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던 것은 엄마의 반항이었다. 수고스러운 나의 노력을 무시하며 나를 그 괴기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도망치려 했다. 그녀의 목에 달린 수많은 고통의 끈을 잘라내었을 때도 그녀는 여전히 고통에 신음했다. 나는 그런 엄마를 피에타(Pietà)처럼 끌어안고 그녀가 불렀던 자장가를 읊었다.

“자장자장 우리 엄마 잘도 잔다 우리 엄마” 엄마는 아프지 않아야 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사랑의 행동은 항상 옳은 것이다. 그 사람을 위한다. 그저 그뿐이다.(같은 내용으로 보이는 글씨가 3번가량 반복되며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어 있다.)


이제 이 6.6㎡(약 2평이다)의 독립된 공간에서 나를 "구원"할 사람은 오직 나다. 이 글을 마치며 운명의 필연성에 저항하려 한다. 교도소에서 자살은 쉽지 않은 일이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곳조차 허락되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사회가 철저하게 자유를 뺏는 방식이다. 그러나 저항의 험난함은 비단 이 분리된 공간 속에 즐비한 범죄자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라는 곳도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모두 태어난 순간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채로 살아간다. 자신의 형량을 결정짓는 것은 누군가의 "구원" 또는 자살뿐이다. 그러나 이 중 주체적으로 죽음을 찾아간 것은 바로 자살일 것이다. (이유는 적혀 있지 않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렇기에 무미한 존재가 거대한 운명 앞에 운명의 거부자로서 대립할 수 있도록 우리는 자살해야 한다. 우리는 X살 X아야 한다. 우X는 X살 X아X 한다. (피로 얼룩져 글자를 판독할 수 없으며, 종이가 날카로운 것에 반복적으로 긁힌 흔적이 있다.)


어머니, 어머 니 oㅓ ㅁ ㅓ ㄴ I

이전 07화사과를 사랑하는 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