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릿한 것들에 대하여
질투는 언제나 비릿한 맛이 난다. 비릿함,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면서도 부정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생기지만 내가 이것을 생산해 냈다는 것에서 강한 자기혐오를 이끌어낸다. 마치 우리의 배설 행위와 닮아 있다.
우리는 먹은 것과 산출된 것 사이의 인과성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이 공을 존 해링턴에게 돌린다. 그 어떤 인간이 감히, 자신이 배설한 것을 보지 않고 오로지 세척되는 소리만 남긴 채 자신의 배설 사실을 망각하게 하는 도구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비록 한시적일지언정, 우리는 고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고결함이 우리의 본질과 본성을 부인하게 된 부작용에 대해 구태여 언급하지 않겠다.
더러움으로 이염된 것은 더러운 것만을 내뱉을 뿐이다. 이는 일종의 공리다. 바닷물에서 짠맛이 아닌 포도주 맛이 나도록 했던 자는 죽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이 사실에 놀란다. 이 경우 우리가 추론 가능한 조건은 단 두 가지다. 첫 번째, '냄새나지 않는 인간의 발견' 혹은 두 번째, 자신이 '깨끗하다고 착각'하거나 이다.
그러나 정정하자면, 첫 번째의 경우는 일전에도 언급했듯이 그의 시해가 첫 번째 조건의 실현가능성을 영(0)에 수렴하게 한다. 그렇다, 그러니 우리는 '착각'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릿한 맛이 혀 돌기를 감싸는 이 상황에 놀란다.
그 맛을 받아드리는 보편적인 행동 양태에 대해서 우리는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지식을 빌려 추정할 수 있다. 먼저 내가 이런 걸 배설해 낼 리 없다면서 부정할 것이며,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에 말도 안 된다며 분노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것을 없던 일로 한다면 내 모든 걸 주겠다며 타협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배설이 피할 수 없는 사실임을 인지함과 동시에 현격한 절망과 자기 비하에 빠지며 우울을 호소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려 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행동들의 과정에서 우리의 필연적인 불완벽성에 대해 탓하기보다 웃기를 권한다. 불완벽한 존재가 무결한 존재를 연기할 때 그리고 그 연기가 깨질 때, 내 뉴런은 여기서 최대의 황홀감을 발산한다. 더럽고 비참한, 그 비릿한 존재를 우리가 목도하게 되었을 때만 자신을 자신으로, 우리를 우리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을 포함해 모든 타인을 가장 대자적으로 대할 수 있게 하는 '도구'인 셈이다.
이 비릿한 썩은 내는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동질감을 부여한다. 타자와 나를 구분 짓고 깎아내리고 승리할 수 있는 수단이 마침내 사라진 것이다. 죽음의 무도회에서 미인 대회가 없는 이유는 악취를 뿜어내는 시체더미에서 우리는 그들과 다른 독창성을 뽐내지 못함에 연유한다. 결국 모두가 편대비행으로 이카루스의 추락을 맞이하는 것이다.
만일 누가 나의 추락 원인에 대해 리포트를 작성한다면, 그 이유는 양지에 대한 저주일 것이다. 나는 양지에 있는 것들에 대해 사무친 염오를 느낀다. 그저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특혜를 받는 것들. 나는 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증오를 느낀다. 결국 이 혐오감은 하나의 그림자처럼 내가 배제된 자리에 오래 서 있었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 리포트의 부제에는 이렇게 적힐지도 모르겠다. '나르시시즘의 자기 방어 기제에 관하여'
그렇다. 이건 사랑이다. 내가 더 '뛰어나'라고 생각하는 현실과의 괴리를 매우기 위한 사랑. 인정받지 못한, 결핍이 있는 자들의 사랑이다. 결국 질투는 나의 달의 뒷면(The Dark Side of the Moon)을 보게 하는 것임과 동시에 나를 향한 한없는 보호와 사랑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모두에게 통하는 은밀하고 더러운 열쇠 구멍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