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사회복지사 2화] 누군가를 기다리는 계절

by 고라해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작지만 진짜인 하루'들을 모아 열 두달의 풍경을 담았습니다. 너무나 당연해서 지나쳐온 일상을 픽션에세이의 형식을 빌어 조금 다른 듯, 닮은 우리의 이야기로 풀어나갑니다.


"외근 다녀오겠습니다!”


나의 보고에도 미동이 없는 팀장님이 의아해 한 번 더 말하려는 찰나, 모니터에 응시하던 시선을 거두고 미소 지으며 말한다.


“축하해! 지애 선생님이 기획한 공모사업이 선정되었네!”


지금까지는 팀장님이 주도적으로 사업의 전체적인 틀을 정하고 방향성을 기획한 뒤, 나는 요청받은 자료를 찾고 분류하는 보조 역할을 했다. 통계청과 각종 논문을 헤엄치며 찾은 자료 속에서 유의미한 핵심 요소를 찾아내는 건 팀장님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문장에 나의 손때가 묻어났다.


사실, 제출 버튼을 누르기까지 모순된 감정이 공존했다. 하나는 선정이 된다면 일이 늘어날 테니 제발 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내 이름이 담당자란에 올라가 있는 만큼 낯부끄럽지 않게 ‘선정’으로 인정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시소를 탄 것처럼 오르락내리락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이 귀신같이 맞는게 사회복지사로 일한 지 2년 조금 넘다 보니 얼추 풍월 비스무리하게 읊조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 내가 기획한 사업이 세상에 통했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걸 보니 내심 바랐나 보다.

내가 처음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 건 옥순 어머니다. 몇 해 전, 함께 살던 지적장애가 있는 자녀의 건강이 악화되어 어머니는 자녀를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자녀를 간병하는 시간이었지만, 남편과 사별한 뒤 오랫동안 함께했기에 서로 의지하는 사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혼자가 된 이후, 옥순 어머니는 하루의 대부분을 집안에서 보내며 사람들과의 접촉을 점점 줄여 나갔고, 자주 오던 복지관에도 발걸음이 뜸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문득 떠올랐다. 혼자 남겨진 어르신이 어떤 어려움을 느낄까. 내가 옥순 어머니라고 생각해보니, 존재의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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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사라는 단어 너머에 있는 건, 관계 단절이 불러오는 우울감, 스스로 세상과 멀어지고 있다는 감각. 그런 분들에게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사회로 나올 수 있는 활동은 없을까 고민하던 끝에, 텃밭 활동이 떠올랐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말이야. 감자 캐던 날은 참 좋았더랬지.” 옥순 어머니는 종종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다. 농사 일이 중노동이기도 했지만, 삶을 묵묵히 일구는 시간이었다는 걸 짐작하게 되었다. 지금은 흙을 멀리하게 되었지만, 대부분 어린 시절 밭일을 해 본 경험이 있을테니 그 익숙함을 다시 불러내는 방식이라면 어르신들도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을까? 그 순간, '이거다!'싶은 확신이 머릿속을 환하게 비췄다.


복지관의 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첫 단추는 바로 참여자를 모집하기 위한 홍보였다. 아무리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라도 사람이 없으면 진행이 안 되기 때문이다. 참여자가 잘 모이지 않는다면 충원하는 데 시간이 걸려 시작이 미뤄지게 되고, 전체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파워 J여서 계획이 틀어지는 걸 불안해하는 나로서는 모든 일정이 차질 없이 굴러가길 바랄 뿐이다.

포스터를 어떻게 만들지 구상한 뒤, 홍보 문구를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쓰고 지운다. 홍보물 제작업체에 레퍼런스 시안을 보냈고, 며칠 뒤 제작된 결과물이 도착했다. '제발 한 번에 다 모집되게 해주세요.’'홈페이지 팝업을 띄우고 회원들에게 안내 문자를 전송했지만, 깜깜무소식이다. 조금이라도 더 모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복지관 복도에 포스터를 붙인다.


"거, 뭐 한다는 내용이요?"


하모니카 반장인 아버님은 가족과 함께 살기 때문에 해당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입이라도 풀고 반응을 살피려는 심산이었다. 정 안 되면 입소문이라도 나길 바라며 말이다.


“홀로 사는 어르신들끼리 함께 모여 텃밭에 작물을 심고 가꾸면서 우울한 마음을 이겨내는 수업이에요."

"내가 식물 박사인데, 참여할 수 없다니 아쉽구먼. 내가 얼마나 잘 키우냐면 말이지!"


그 순간부터 대화의 주도권은 완전히 반장 어르신에게 넘어갔다. 손에 쥔 휴대폰을 펼치더니 사진첩 속 갖가지 식물 사진을 연달아 보여주시기 시작했다. 내 눈엔 전부 비슷한 빨간 꽃처럼 보였지만, 어르신은 각각의 이름과 특징을 또렷이 읊으며 자랑을 이어가셨다. 그때였다. 복도 끝에서 과장님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반사적으로 외쳤다.


"아, 과장님! 잠깐 드릴 말씀이요!"


보고할 게 있긴커녕, 보고할 생각조차 없었다. 그저 이대로 있다간 어르신의 “이건 백일홍이고, 저건 천일홍이고 말이야~” 삼천포 강의까지 듣게 생겼기 때문이다. 사진 한 장이 끝이 아니고, 그 사진에 얽힌 사연, 키운 비법, 꽃말, 날씨 이야기까지 이어지는 풀코스 설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열정은 존경스럽지만, 업무 마감이 걸린 나로선 오늘은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살짝 죄송하긴 했지만, 다음에 듣기로 마음속 다짐을 하며 마치 긴급 상황에 호출된 척, 나는 잽싸게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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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기한은 임박하는데, 신청서는 몇 장 채워지지 않았다. 계획서에 당차게 적어낸 인원 10명, 그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전화 문의가 두세 건 있어 열심히 상담했지만, 결국은 조심스러운 거절이었다.


"난 무릎이 아파 오래 앉아 있기 어려우니 하기 어렵겠구먼."

"아~ 복지관에 와서 키우라는 말이었어? 나는 화분을 주고 집에서 키우라는 말인 줄 알았어."

"궁금해서 전화한 거긴 한데, 좀 더 생각할게요."


‘관심이 없으신 건가.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 불안감은 자꾸만 차올랐다. 점심시간, 무심코 넋두리처럼 내뱉었다.

"아무래도 참여자가 잘 안 모여요. 시작일은 다가오는데, 텃밭에 씨를 뿌리기도 전에 제 속이 먼저 말라비틀어질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희서 선생님이 젓가락을 멈추며 말했다. "우리 자조 모임에 남자 어르신 한 분이 요즘 많이 울적해하시는데, 딱이네. 제가 한번 권해볼게요." 옆에서 듣던 물리치료사 선생님도 덧붙였다.“말하다 보니 참여하면 좋을 것 같은 어머님 한 분이 떠오르네." 그날 이후, 직원들 사이에서 추천을 받은 어르신들이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누구는 복지관 동아리에서 만났던 분, 누구는 운동 다녀가시는 분, 누구는 혼자 식사하시는 게 눈에 밟혔던 분. '혼자 할 순 없는 일이었는데, 다 감당하려 했구나.' 뒤늦은 자각이 밀려왔다. 며칠 뒤, 신청자 명단을 다시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어라? 벌써 10명이 다 모집되었네?'


각자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어르신들이 하나로 연결된 순간이었다. 포스터보다도, 문자보다도, 결국 사람이 사람을 데려왔다. 아직 씨앗을 심지도 않았지만, 그날은 마음속에 작은 싹 하나가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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