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류장 하나만큼의 거리

낯선 동네가 건네는 뜻밖의 위로

by 이담우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조금씩 나를 갉아먹을 때가 있다.

놀랍도록 특별할 것 없는 하루들.

아침에 일어나 일하고, 집에 돌아와 잠들고, 또 다시 같은 하루.

그러다 문득, 이렇게 살다간 ‘어디까지 내가 무뎌질까’ 싶어진다.

그럴 땐 여행이 힘들다면
‘버스 한 번’만 타보자.


목적지 없는 여행의 시작

정확히 어디로 가겠다는 계획 없이
동네 정류장에서 아무 버스나 잡아탄다.
네이버 지도도 끄고, 목적지 검색도 하지 않는다.

그저 노선도에 낯익지 않은 동 이름 하나.
그거면 충분하다.
가본 적도 없고, 가볼 일도 없을 법한 동네.
그 낯선 이름이 오늘의 여행지다.


내려보는 용기

내릴 이유도, 내리지 않을 이유도 없는 정류장에서
그냥 ‘지금 여기다’ 싶은 순간에 버튼을 누른다.

막상 내려보면, 익숙한 도시의 풍경이면서도
조금 다른 리듬이 흐른다.
어딘가 조용하고, 조금은 느슨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지지 않은 안도감 같은 것.


발길 닿는 대로

동네 상점들 앞을 지나고
이름 모를 분식집에서 오뎅 하나 먹고
작은 문구점이나 꽃집 쇼윈도를 들여다본다.

간판 없는 오래된 카페가 있다면
무작정 들어가본다.
에어컨 바람에 식은 유리컵과
손님들 틈에서
나도 그냥 ‘동네 사람’처럼 앉아있는다.

그곳의 공기는 ‘해야 할 일’보다
‘지금 이 시간’을 먼저 들여다보게 만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다

이 여행은 어디를 찍고, 무엇을 샀고, 몇 걸음을 걸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어디로 가든 그저 낯선 풍경 속에 나를 풀어놓는 일.

그게 회복이다.
세상이 나에게 말을 걸기 전에,
내가 먼저 나를 돌아보게 되는 시간.


결국, 이 짧은 여행이 남기는 것

한두 시간쯤 걷고 돌아오는 길,
버스 창밖으로 이제 익숙해진 그 낯선 동네가 스쳐간다.

이 여행엔 인증샷도, 기념품도 없다.

하지만 돌아오는 발걸음은 이상하리만치 가볍다.

몸이 아니라 ‘감각’이 살아나는 기분이다.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정류장 하나만큼의 거리,
낯선 동네가 우리의 마음을 아주 조용히 어루만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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