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과 화합의 도시 - 암니차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반복되는 일상의 무게가 느껴지는 날에 읊고 싶은 나태주 시인의 "풀꽃 1"입니다. 시인의 말처럼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 사랑스럽지만, 걸어온 여정이 부족한지 인도는 사랑도 미움도 아닌 그저 삶의 터전으로만 다가옵니다. 그래도 인도에 대해 하나씩 알아갈수록 우리나라와 비슷한 아픔을 겪어온 나라임을 느낍니다.
[식민의 역사]
일본으로부터 36년간 치욕의 시기를 거친 우리나라처럼, 인도는 영국에 의해 200년간의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혹자는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주의로 인하여 별다른 마찰이 없었다고도 하지만, 역사는 전혀 다릅니다. 지난 4.13일이 영국이 인도를 통치한 200년의 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사건으로 기록되는 암리차르 대학살 사건이 일어난 날입니다. 1919년 4월 13일 인도 펀잡주 암리차르의 잘리안왈라 바그 공원에서 영국군이 독립운동가 체포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무차별 사격을 가해 379명에서 1,500명 이상이 사망하고 1,2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고 합니다. 잘리안왈라 바그 학살은 식민지배가 최악으로 치달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독립 이후에 남한과 북한으로 단절된 우리나라처럼, 영국령 인도는 독립과 동시에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단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며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것으로 식민지 통치가 끝났습니다. 대신 36년간 우리를 착취하던 일본이 사라진 자리에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개입하였습니다. 그들의 사상적 분열에 따라 38선으로 가로막히며 분단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광복 이후 5년이 채 되지 않아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우리 민족은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눌 수밖에 없게 된 슬픈 역사와 그로 인한 파괴의 상처를 겪었습니다. 인도는 우리보다 2년이 늦은 1947년 8월 15일에 광복을 맞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인도의 독립문제도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됩니다. 1947년 6월 3일 영국의 마지막 총독인 루이스 마운트 배튼이 영국군의 철수를 발표하면서 1947년 8월 14일 11시 57분에 파키스탄은 별도의 국가로 선언되었고, 1947년 8월 15일 12시 2분에 인도는 주권을 돌려받았습니다. 우리나라도 해방에서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까지 3년의 시간이 걸린 것에 비해서, 3개월 안에 인도를 파키스탄과 분리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인도-파키스탄의 분단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으나, 주된 원인은 종교갈등으로 힌두와 무슬림의 대립입니다. 인도 북부 펀잡(Punjab) 지역은 예로부터 무슬림이 많았고 영국 식민지 시대부터 종교와 정파 싸움으로 빚어진 갈등이 산재했습니다. 1940년 라호르(Lahore)에서 영국령 인도 북서부와 동부에 연속된 무슬림 국가의 설정을 요구한 결의에서 파키스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파키스탄은 우르드어로 순수함이 넘치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인도 서쪽에 무슬림이 다수 거주하는 인더스 강 유역 5개 지역 펀잡(Punjab), 아프가니아(Afghania), 카슈미르(Kashmir), 신드(Sindh), 발루치스탄(Baluchistan)에서 글자를 따와 PAKSTAN을 만들고, 발음의 용이성을 위해 중간에 i를 추가했다고 합니다. 1947년 독립 이후, 또 한 차례의 격동을 거쳐 1971년에 서파키스탄은 파키스탄으로,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분리되었습니다.
지난 4월 식민지배와 분단의 아픈 역사를 가진 도시, 암리차르(Amritsar)를 다녀왔습니다. 국경선의 국기하강식을 볼 수 있는 와가 보더(Wagah Border)를 첫 방문지로 삼았습니다. 분단의 현장이라 하여 우리나라의 판문점이 연상되었는데 사실은 성대한 국기 하강식이 열리고 있는 큰 규모의 스타디움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6.25 전쟁 이후 군사분계선 양측으로 2킬로 미터의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 DMZ)가 있지만,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에는 그에 비해 얇디얇은 문 하나만이 있을 뿐입니다.
와 가보더에서는 매일 6시에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기 하강식이 열립니다. 당연히 국경수비대가 있고, 양쪽의 특이한 전통복장을 한 군인들과 이를 보기 위한 관람객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습니다. 지금은 평화의 시간(shanti ghanta)이라는 노래도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국기하강식은 6시이지만 대략 4시부터 두 나라의 기세 싸움이 시작됩니다. 흥겨운 노래로 시작해서 춤, 군인들의 행진 등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됩니다. 하강식이 가까워오자 여자들만 광장으로 나와서 떼춤을 추는 장면도 있습니다. 함성을 가득 담아 파키스탄 진영으로 날려 보내기도 합니다. 어린 학생들부터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애국심을 함 꺼 고취하고 가는 듯합니다.
다음으로 간 곳은 암리차르 시내에 있는 분단 박물관(Partition Museum)입니다. 와거 보더에서의 흥겨움과 함성이 아닌 학살의 잔혹함 느껴졌습니다. 1947년 6월 영국의 인도 철수 명령이 내려지고, 펀잡주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이 정해지자 대규모 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펀잡 경계에서만 대략 1천만 명이 이동을 했다고 합니다. 이슬람을 믿는 약 435만 명은 동쪽에서 서쪽 펀잡으로, 힌두교를 믿는 약 430만 명은 서쪽 펀잡에서 동 펀잡으로 이동했습니다. 20세기를 통 들어 최단기간 내 최다 인구의 이동이라 합니다. 방향은 달라도 피난 경로는 길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힌두교인과 무슬림은 서로 마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나 기차가 복병이었습니다. 기차역 곳곳에서 습격과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다음 기차역에서 보복을 가했고, 다시 다음 역에서는 보복당했습니다. 보복과 복수가 반복되면서 남성들이 보여준 극한의 야만성은 종교를 가리지 않았고, 취약한 여성들을 강간하고 적에게 치욕을 남겼다고 합니다. 사람이 어찌 이렇게 잔혹할 수가 있을까요? 그들은 단지 부모들이 물려준 종교의 길을 따라, 분단의 현실을 따라 이동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무한의 악순환으로 기차는 떠났지만, 철로에는 핏자국이 남아있었습니다. 기차마다 산 자만큼이나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시체를 싣고 도착하는 죽음의 행렬은 1947년 대분할의 상징으로 남아있습니다. 박물관을 돌아다니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종교가 구원의 손길이 아닌 학살의 원동력으로 전락해 버린 아픈 역사의 흔적들이 뇌리에서 쉽게 가시질 않았습니다.
[황금 사원과 넉넉함]
와거 보더의 함성과 분단 박물관의 먹먹함을 간직하고 황금사원(Sri Harmandir Sahib)에 도착했습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시크교도들의 성지는 사각형의 넓은 호수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시크교는 15세기말 구루 나낙(Guru Nanak)에 의해 펀잡 지역에서 창시된 종교입니다. 시크교는 타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고 평등과 합리성을 중시합니다. 현재 2% 정도의 인구가 시크교도를 믿고 있으며 전통을 따르는 시크교도들은 머리에 터번을 쓰고 수염을 기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시크교 지도자는 초대 구루 나낙에서부터 10대까지 계승되어 왔고, 10대 구루인 고빈드 라이는 경전인 ‘아디 그란트’(또는 그란트 사히브)>에 구루의 지위를 승계하여 현재의 황금사원에 보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아닌 경전에게 구루의 직위를 부여한 발상도 놀랍습니다. 또 시크교도들도 학살의 아픈 역사가 있었습니다. 1984년에 일부 분리주의 시크교도들이 황금사원에서 농성하다가 무력으로 진압되었고, 이 사건의 보복으로 인드라 간디 총리가 두 명의 시크교 경호원에 의해 암살되었습니다. 암살은 또 다른 보복으로 이어져서 약 8천 명의 시크교도들이 학살을 당하게 됩니다. 수많은 희생이 기록된 곳임에도 불구하고, 호수를 배경으로 빛나는 아침의 황금사원은 평온하기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드리고, 성수에 목욕을 하고 경전을 읽고 있었습니다. 절의 불경소리와 비슷한 경전 소리에 점점 빠져들었습니다. 종교 상관없이 누구나 입장을 할 수 있고, 입장료도 없었습니다. 사원을 찾은 모든 사람들이 편히 쉴 수 있고 공짜로 밥을 얻어먹을 수도 있습니다.
암리차르에 다녀오고 난 후 인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과 분단의 역사, 종교 갈등이 빚어낸 학살의 흉터를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광기와 욕망으로 일그러지고 아픈 흔적들이 있고,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또 아직 단죄하지 않은 아픔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김없이 매일 태양을 맞이하는 황금사원의 넉넉함과 관용의 정신을 보게 되었고, 와가보더 국기하강식에서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저에게는 인도가 상처와 아픔을 감내하면서도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해 나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2024년 4월 인도에서 소전(素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