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를 청에 봄 춘

청춘의 이름

by 최윤형

『나는 읽기 쉬운 마음이야』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_잔나비


나는 청춘이라는 단어를 매우 좋아한다. 단순히 젊음을 뜻하는 말을 넘어서, 그 안에 담긴 생기와 무게, 빛과 그림자, 시작과 흔들림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청춘은 싱그러운 표현을 담은 수많은 단어들 중에서도 가장 그 의미가 명확하고도 깊게 드러나는 단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는 청춘을 바람 같다고도, 불꽃같다고도 말하지만, 나에게 청춘은 ‘푸른 봄’이라는 뜻 그대로, 어떤 생명력 있는 계절이다. 무언가 피어오르는 계절, 아직은 미완성이라 더욱 선명한 계절,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운 시간.


푸른 봄을 뜻하는 우리의 청춘은 길고 짧음을 재볼 필요도 없이, 저마다의 아름다운 모양을 그리고 있다. 누군가에겐 오래 지속되는 찬란한 계절일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겐 짧고 아득하게 스쳐간 한 시절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모양은 일정한 틀 안에 가둘 수 없는, 각자의 성장과 시도의 궤적이다. 청춘은 정해진 한계 없이 끊임없이 자라고 있고, 계속해서 변화하며, 멈추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머무르는 어떤 에너지, 삶을 향한 사유와 움직임, 그리고 타오르는 의지와 불안을 아우르는 이름이 바로 청춘이다.


그렇다면 청춘의 기간은 과연 언제까지일까. 누군가는 이를 스무 살에서 스물아홉까지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삼십 대 중반까지도 청춘이라 부른다. 그러나 나는 그 기간을 정하고 구분하는 것 자체에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청춘이란 결국 나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이자 감각이며, 존재의 방식이다. 청춘은 시간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청춘이라 함은 푸른 봄에 걸맞은 활발한 에너지와 생기 있는 시도, 그리고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정신적인 사유의 과정에서 비롯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무언가를 꿈꾸며, 때로는 아파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내적인 동력에서 온다. 우리는 그 에너지를 통해 삶과 삶 사이의 틈을 견디고, 어떤 날은 어른이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또 어떤 날은 아이처럼 투명하게 흔들린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 느낌이야말로 청춘의 본질이다.


살아있으나 살아있다고 볼 수 없는 것들과 사라졌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들 속에서 우리는 존재의 가치를 다시 묻게 된다. 어떤 사람은 지금 곁에 없지만, 그 사람과 함께했던 순간의 기억은 여전히 내 삶을 푸르게 만든다. 어떤 시간은 이미 지나갔지만, 그때 느꼈던 감정은 여전히 현재의 나를 움직인다. 만약 우리가 그런 기억 속에 아름답게 남아 있거나, 혹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푸른빛처럼 생동감을 주고 있다면, 그것 역시 다양한 형태로 청춘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듯 청춘은 단순히 젊음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과 맺는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감각이자 정서이며, 삶의 한 국면을 바라보는 깊이 있는 시선이다. 청춘은 삶 속에서는 구분할 수 없는 넓고도 포괄적인 범위를 지닌다. 때로는 그것이 죽음의 경계조차도 허물어주는 단어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살아 있을 때의 청춘뿐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은 어떤 사람, 혹은 다시 떠올릴 수 있는 어떤 장면, 그 모든 것이 또 다른 방식으로의 청춘이다.


결국 우리의 기억 속에 푸른빛으로 남아 있는 그 순간들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새로운 푸르름이 모두 청춘이라는 가치 안에 공존한다. 잊지 못할 누군가의 눈동자와 미완의 꿈을 안고 흔들리던 어떤 밤, 그리고 설레면서도 두려웠던 첫 시작 속에 있는 감정들.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청춘이었고, 어쩌면 여전히 우리 안에서 계속 피어오르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청춘의 가치이며, 정의이다. 청춘은 흔들리고 쓰러지더라도, 결국 삶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푸른 마음의 이름이다.

이전 02화질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