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시는 단순한 도시 개발이 아니라, 대한민국 도시화의 상징적인 장면에서 태어난 도시다.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맥락이 얽혀 있어 그 형성 과정은 매우 흥미롭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하남 위례성이 있던 지역으로 추정되며, 이후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며 ‘광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오랜 세월 동안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해온 지역이다. 1960~70년대, 서울의 급격한 도시 팽창으로 무허가 주택 정비가 시급해졌고, 서울시는 철거민들을 이주시킬 신도시를 계획하였다. 이때 선택된 곳이 바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대, 지금의 성남이다.
정부는 ‘광주대단지’라는 이름으로 서울 철거민 약 12만 명을 이주시켰지만, 기반 시설은 전무했고 생계 대책도 부족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1971년 8월 10일,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며, 이는 해방 이후 최초의 도시 빈민 투쟁으로 기록되었다.
사건 이후 정부는 사업 주체를 서울시에서 경기도로 이관하고, ‘성남단지’로 명칭을 변경한다. 1973년 7월 1일, 경기도 성남시로 승격되며 대한민국 최초의 계획 신도시가 된다. 지금은 분당이라는 신도시가 성남을 대표하지만, 구시가지는 평지가 아닌 수많은 언덕 위에 형성되어 여러모로 관리가 어려웠다.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이면, 주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공무원이 도로와 골목의 제설 작업에 투입되었다. 필자가 거주하던 집도 언덕 중턱에 있었다. 눈 오는 날이면 미끄러지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공무원으로 일하며 만난 이들 중에는 말 못 할 사연을 지닌 이들이 유독 많았다. 공무원 중에도 검정고시 출신이 많았고, 이주민들의 고단한 삶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도 자주 있었다. 전라도, 경상도 등 지방에서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와 어렵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느 날 밤 갑작스럽게 온 가족이 차에 실려 성남으로 이주당한 가슴 아픈 사연들이 빼곡했다.
발령 당시, 농촌 지역이던 분당 곳곳에는 건물과 농지를 가로지르는 붉은 개발 선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다. 신도시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졸부들이 속속 등장하기도 했다. 매일 새벽마다 마차에 농산물을 싣고 가락시장을 오가던 한 주민은 거액의 보상금을 받고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중형차에 운전기사를 두고 슈퍼에 갈 때도 기사가 운전하고, 동사무소에 전화로 서류를 발급받은 뒤 찾으러 갈 때는 10만 원을 주며 잔돈은 식사하라 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가끔 그들끼리 고스톱을 치다 동사무소 직원들을 불러 떡값을 건네면, 그 비용으로 전 직원이 회식을 하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개발 속에서 벌어진, 웃지 못할 풍경이었다.
단 한 장의 개발계획이 지역을 바꾸고, 인간의 오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것이다. 도심의 맨살 같던 야산과 들판에 첫 삽이 들어갔을 때, 마치 땅도 어리둥절해하는 듯했다. 굴착기와 중장비의 굉음은 잠자던 대지를 깨우는 북소리 같았고, 먼지가 휘날리는 그 속에서 미래가 먼동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몇 년 전 재미있게 보았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도 분당 개발과 관련된 내용이 나와서 공감했고, 감회에 젖었다. 분당 신도시 개발은 단순한 도시 확장이 아니라, 운명이 뒤바뀌는 대서사였다. ‘천당 밑에 분당’이라는 표현처럼, 그야말로 천지개벽이었다. 지금도 분당을 떠올릴 때면 묘한 울림이 남는다. 논밭과 두렁이었던 그곳이 어느새 문화와 비즈니스의 중심지가 되었으니, 그때는 상상조차 어려웠던 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