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처리 문제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풀어야 할 숙제다. 1991년, 청소계로 보직이 변경되어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 미화원은 약 200명, 청소차 기사도 20여 명에 이르렀다. 지금은 대부분의 구역이 민간에 위탁되어 관리되고 있지만, 그때는 시에서 직접 운영하던 시기였다.
아파트에는 라인마다 쓰레기 공동 투입구가 있어, 가정에서 직접 쓰레기를 떨어뜨리는 방식이었다. 분리수거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상가나 가정의 쓰레기는 새벽에 청소 차량이 음악을 틀며 도착하면, 주민들이 각자 들고 나와 차량에 버리는 체계였다. 구 성남시 지역은 언덕길과 골목이 많은 지형적 특성 탓에 차량 진입이 어려웠다. 시민들이 쓰레기를 직접 들고 나와야 했다. 이런 여건 속 ‘따방 ’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따로 방문한다’는 뜻으로, 미화원이 가정을 직접 방문해 쓰레기를 수거하는 방식이다. 가정에서는 월 3천 원 에서 5천 원 정도 부담했고, 상가는 그보다 더 많은 수거비를 부담했다. 수거된 쓰레기를 매립지까지 운반하는 차량 기사에게는 미화 원이 일정액을 지급하는 구조였다. 행정과 시민, 그리고 현장의 노동이 맞물려 돌아가던, 그 시절만의 독특한 수거 체계였다.
예전 새벽 시간, 쓰레기 수거 차량이 사용하던 음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은 바로 「뻐꾸기 왈츠」였다. 경쾌하고 반복적인 멜로디 덕분에 시민들에게 쓰레기 수거 시간을 알리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외에도 「터키 행진곡」, 「희망의 나라로」, 「유모레스크」, 「잘 살아보세」, 「스케이팅 왈츠」, 「좋아졌네」, 「카르멘 중 투우사의 노래」 등 다양한 곡들이 차량 운행 중이나 정차 중에 1분씩 방송을 하였다.
미화원은 크게 차량조와 가로조로 나뉘었다. 가로 조는 맡은 구역의 특성에 따라 수시로 도로변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방식이었다. 일정한 틀에 묶여 있지 않아 비교적 자유로웠고, 틈틈이 시간을 내어 청소하면 되었다. 시가 지역은 쓰레기 발생량이 많아 힘들었지만, 상가의 쓰레기를 치워주고받는 부수입이 짭짤했다. 반면 외곽 지역에 배정된 미화원은 쓰레기가 적어 상대적으로 여유로웠다. 일부는 ‘투잡(two job)’을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차량조는 새벽에 차량에 탑승해 쓰레기를 수거하고 업무를 마무리했다. 이후 남는 시간에는 각 가정의 쓰레기를 대신 수거해 주며 부수입을 얻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가끔 고스톱을 치던 주민들이 청소계 직원들에게 회식하라고 돈 주기도 했는데, 꽤 큰 금액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강한 추진력으로 유명했던 오성수 시장은 ‘따방’이 시민에게 이중과세라며 이를 금지했다. 그러나 그 결과, 온 시내가 쓰레기로 넘쳐나고 민원이 빗발쳤다. 결국 며칠 만에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비공식적인 체계를 총괄하던 청소차 반장의 위세는 시장조차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골목골목을 누비는 이들의 영향력은 선거 과정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후 청소 업무는 민간 위탁 운영으로 전환되었고, 청소 차량 반장은 시로부터 수거·운반업 허가를 받았다.
1995년, 쓰레기 종량제가 전면 시행되면서 이러한 방식의 쓰레기 관리 문화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생활폐기물 감소, 재활용률 증가, 해충 감소 등 경제적·위생적 측면에서 큰 변화가 있었고, 사회의 환경 인식과 생활 방식 전반을 바꾼 획기적인 제도였다.
필자의 제안으로 경기도 최초로 여성 미화원을 채용한 일도 있었다. 청소 중 사고로 사망한 미화원의 부인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여성 미화원은 드물었다. 송파구에서 여성 미화원을 처음 채용했다고 방송과 신문에 보도되던 시절이었다. “힘든 업무이므로 여성은 안 된다”라는 청소반장의 강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반대를 무릅쓰고 2명을 채용해 시내 중심 가로에 배치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꼼꼼하고 깨끗하게 관리를 잘 해냈다.
청소는 아무리 잘해도 표시가 나지 않고, 못하면 바로 드러나는 일이다. 결과만 남고 과정은 사라지는 일이지만, 그 과정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