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로운 삶

by 최영남

여유로운 삶

17년의 시간, 그리고 양평에서 마주한 삶의 온도

사무관으로 승진하기까지, 공직 생활 17년 동안 거의 내 시간을 갖지 못했다. 매일 야근은 기본이었고, 휴일 근무도 다반사였다. 고향 친구들, 학창 시절의 인연들도 거의 만나기 어려울 만큼 바쁘게 살아온 시간이다. 공직자의 길은 늘 책임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지금 다시 돌아가라면 도저히 못 할 것 같다.

벼 수확을 위한 휴가, 그리고 퇴근 풍경

어느 날, 환경사업소 팀장 두 명이 휴가 결재를 요청했다. 이유를 물으니, 가을철 벼 수확을 위해서라고 했다. 도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녁 6시가 되면 직원들이 모두 퇴근했다. 나는 도에서 매일 야근하던 습관대로, 컴퓨터가 있는 사무실에 남아 있다가 퇴근했다. 한 달쯤 지나, 주무 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직원들이 불편해하니, 일찍 퇴근해 주세요.” 그 말에 나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일찍 퇴근해서 뭘 할 수 있을까?’


알고 보니, 직원들은 퇴근 후 다양한 취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색소폰, 기타, 테니스, 배드민턴, 산악자전거 동호회 등등. 그들의 삶은 일과 취미, 가족과 공동체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풍경이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구나.” 도청에 비해 승진은 느릴지 몰라도, 그들의 삶은 여유롭고, 질적으로 훨씬 풍요로웠다.


양평에서 나는 단지 행정을 배운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삶의 균형과 사람의 온도를 배웠다. 공직자의 길이 반드시 희생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행정도 결국 사람을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다.


간부회의 풍경, 그리고 낯선 일상의 온기

간부회의가 시작되기 전, 나는 군정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오갈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새벽에 밭에 약 준 이야기, 어제 술 한잔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여태 겪어보지 못한, 색다른 세상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대화에는 삶의 온기와 여유, 그리고 사람 냄새가 묻어 있었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균형

도청에서의 삶은 늘 무언가에 쫓기듯 움직였다. 계획보다는 대응, 여유보다는 긴장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양평에서 만난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스스로 계획하고, 여유롭게 움직이며, ‘해야 할 일’뿐 아니라 ‘하고 싶은 일’에도 시간을 투자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게 진정 살아가는 법이구나.

도시와 지방, 삶의 구조가 다르다.

수원 등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집을 마련하는 데 많은 시간과 자원을 쏟는다. 이후엔 대출금을 갚느라 매달려, 자신에게 투자할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도청의 빡빡한 생활도 한몫했다. 반면, 양평의 공무원들은 집값이 저렴해 이른 시기에 집을 마련하고, 모이는 돈으로 땅도 사며 여유 있게 살아간다. 물론 부동산의 값어치는 도시보다 낮지만, 행복지수는 상대적으로 훨씬 높다.

돈은 도구, 삶은 목적

나는 양평에서 중요한 진리를 배웠다. 돈은 좋은 도구일 뿐,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돈이 삶의 중심이 되면, 삶의 균형은 쉽게 무너진다. 행복은 소유보다 존재에서, 속도보다 깊이에서, 효율보다 의미에서 피어난다는 것을, 양평의 삶을 통해 새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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