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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Nov 19. 2021

〈양들의 침묵〉 그리고 두 번의 여성혐오

영화 〈양들의 침묵〉(1991) 리뷰


  1991년에 개봉한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와 버팔로 빌은 지금까지 회자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캐릭터다.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버팔로 빌)를 잡기 위해 수감 중인 또 다른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한니발 렉터)를 활용한다는 게 영화의 기본 줄거리인데, 배우들의 섬뜩한 연기력과 탄탄한 연출은 이 영화가 웰메이드 스릴러의 표본으로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양들의 침묵〉이 두 캐릭터의 연기력에서만 스릴러의 긴장감을 끌어 오는 건 아니다. 영화가 어떻게 장르적 쾌감을 생산해 내는지 살펴 보자. 핵심은 트랜스/여성혐오다.


  먼저 MTF 트랜스젠더 캐릭터 묘사다. FBI가 쫓는 살인마 버팔로 빌은 MTF 트랜스젠더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성별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살인을 한다. 덩치가 큰 여자들을 납치‧살해한 후 살가죽을 벗겨 자신의 몸에 걸치며 여성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식이다. 성별 이분법이 강제로 할당한 성별 정체성을 거부하고 더 편안하고 자신다운 선택을 내리는 트랜스젠더 서사가 변태적 가학행위로 그려지는 것이다.


  미디어가 트랜스젠더를 재현해 온 역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디스클로저〉에 따르면, 트랜스젠더 악마화는 미국 영화 역사의 시작부터 있었다. 〈양들의 침묵〉 속 버팔로 빌은 그 오랜 전통에 편승한 가장 악랄한 묘사 중 하나였을 뿐, 트랜스젠더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재현은 아니었던 것이다.


연쇄 살인마를 연기한 버팔로 빌


  그렇다면 왜 트랜스젠더는 늘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로 악마화되어 재현되어 왔을까? 그들이 ‘알 수 없는’ 대상, 악마화해도 ‘별문제 없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는 늘 과도한 대중적 호기심에 시달려왔다. 문제는 그 호기심이 트랜스젠더의 삶에 대한 진지한 배려가 결여된 질문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트랜스젠더의 성기 수술 여부, 유년기의 정신적 트라우마 여부, 트랜스젠더가 수행하는 성별 역할의 ‘전형성’ 등을 캐묻는다. 이는 모두 트랜스젠더를 향한 자신들의 편견을 재확인하기 위한 질문들이다. 트랜스젠더를 향한 대중의 질문에는 외부 성기와 성별 정체성을 분리시켜 사유하지 못하는 무능, 트랜스젠더는 정신적 문제를 겪었을 것이라는 편견에 찬 가정, 남성성과 여성성의 두 범주로만 젠더 수행을 해석할 수 있는 편협함 등이 담겨 있다. '알 수 없는 타자'를 향한 본인들의 괴팍한 호기심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출해 온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는 트랜스젠더를 향한 대중적 편견을 아무런 검토 없이 받아들였고, 이를 바탕으로 트랜스젠더를 폭력적인 방식으로 재현했다. 〈양들의 침묵〉의 버팔로 빌은 트랜스젠더를 향한 악독한 무지의 가장 극단에 있는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영화가 자아내는 긴장감은 트랜스젠더를 향한 대중들의 편견에 찬 공포‧호기심에 편승함으로써 가능해진 비윤리적인 성취였던 것이다.


수감 중인 한니발 렉터와 대화하는 클라리스 스털링


  두 번째는 버팔로 빌을 쫓는 FBI 요원 클라리스 스털링의 처지다. 여성인 그는 아직 정식 요원이 아닌데, 감옥에 수감된 또 다른 남성 연쇄 살인마인 한니발 렉터의 호감을 살 수 있다는 이유로 작전에 발탁된다. 일종의 미인계인 셈이다. 스털링은 정신과의사였던 렉터로부터 빌의 심리를 추적할 단서를 얻으려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렉터는 스털링에게 순순히 협력하지 않는다. 게다가 스털링의 남자 상사들은 스털링이 여자이고 신참이라는 이유로 정보를 완전히 공유하지 않는다. 이는 〈양들의 침묵〉이 장르적 성취를 길어 오는 또 다른 설정이다. 노회한 남자들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며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안갯속을 헤매는 스털링의 혼란을 관객에게 전이함으로써 스털링이 버팔로 빌과 최종적으로 조우했을 때의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양들의 침묵〉은 분명 ‘뛰어난’ 스릴러 영화다. 하지만 두 번의 여성혐오를 거친 후에야 그럴 수 있다. 트랜스젠더 여성을 살인마로 악마화하고, 여성을 진실로부터 소외시키는 설정 없이 〈양들의 침묵〉의 성취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양들의 침묵〉이 빼어난 스릴러 영화임을 언급할 때, 영화가 여성혐오에 기반한다는 점도 반드시 함께 언급되어야만 하는 이유다. 그래야만 대상에 대한 무지를 비윤리적으로 재현하거나 누군가를 소외시키지 않고도 관객에게 장르적 쾌감을 안겨 주는 스릴러 영화가 더 많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아래는 〈매트릭스〉 등을 연출한 앤디 워쇼스키가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하고 릴리 워쇼스키가 된 후 기고한 글의 일부다. 트랜스젠더는 영화의 소재이기 전에 삶을 살아가는 동료 시민이자 인간이다. 무책임한 영화적 재미와 현실의 삶 중 어디에 더 큰 가치를 매겨야 할지는 너무도 자명하다.



‘양들의 침묵’ 이후 먼 길을 왔지만, 우리는 지금도 매체에서 악마화되고 비난을 받는다. 우리를 공격하는 광고들은 우리를 잠재적인 포식자로 보고, 심지어 빌어먹을 화장실도 못 가게 하려 한다. 미국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른바 화장실 법은 어린이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고, 트랜스젠더들이 구타 혹은 살인을 당할 수 있는 화장실을 쓰게 만든다. 우리는 포식자가 아니고 먹이다.

그래, 나는 트랜스젠더다.

그래, 나는 성전환을 했다.


*출처: 릴리 워쇼스키 기고글 출처

https://www.huffingtonpost.kr/2016/03/09/story_n_941481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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