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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Dec 19. 2021

여자는 여자를 돕는다

영화 〈컬러 퍼플〉(1985) 리뷰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말을 처음 듣고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껏 자기들끼리 높고 영향력 있는 자리를 두고 때로는 나눠 갖고 때로는 다투며 세상을 이 모양으로 만든 건 남자들이었으니 말이다. ‘여적여’는 여성들의 단결과 저항을 아니 꼽게 바라보는 누군가의 악의적 프레임에 불과하다.


  여자는 여자를 돕는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해 1985년에 개봉한 〈컬러 퍼플〉은 여자들이 어떻게 서로를 돌보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왔는지를 다루는 영화다. 주인공은 셀리다. 흑인 여성인 셀리는 일생을 폭력과 착취 하에 살았다. 계부에게 성폭행을 당해 두 번의 임신을 했고, 아이들은 출산하자마자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 팔려가듯 결혼한 앨버트는 셀리를 하녀 취급하고 툭하면 폭력을 휘두른다.


셀리


  앨버트는 계부의 희롱을 피해 도망쳐온 셀리의 여동생 네티에게도 가혹하게 군다. 네티를 범하려다 실패한 그는 네티를 집 밖으로 쫓아냄으로써 두 자매를 갈라놓으려 한다. 심지어 네티가 보내는 편지마저 감추어 셀리에게 전달하지 않는다.


  어린 나이부터 갖은 폭력과 착취에 시달린 셀리는 중년이 훌쩍 넘은 나이까지 상황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변화의 계기는 셔그라는 여성이다. 클럽에서 공연을 하는 셔그는 셀리와 달리 매력적인 목소리와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다. 셔그를 흠모하는 앨버트는 그녀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며 호의를 베푸는데 이로 인해 셀리도 셔그와 가까워질 기회를 얻는다.


셀리와 셔그


  셀리는 아름다우면서도 언제나 당차게 행동하는 셔그에게 점차 끌린다. 그녀를 보며 웃음을 짓고, 기쁨을 느끼며, 애정을 느낀다. 설레는 스킨십과 수줍은 키스를 나누기도 한다. 셀리는 셔그를 만나고 나서야 자신이 지금껏 한 번도 누려본 적 없던 자유의 크기를 체감한다. 핵심은 여자들의 관계다. 비록 셔그가 셀리를 앨버트로부터 떨어뜨려주지 않고 떠나 다른 남자와 결혼해 실망을 느끼기도 하지만, 어쨌든 셔그로 인해 셀리는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는다. 게다가 셔그는 후일 지금껏 앨버트가 감추어둔 네티의 편지를 찾아 셀리에게 전해주고 셀리가 앨버트를 떠나 홀로 정착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 한 명의 중요한 여성은 소피아다. 그녀는 자신을 때리는 남자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당찬 흑인 여성이다. 하지만 그 화끈한 성격이 화근이 되었다. 백인 시장의 아내가 ‘호의’로 건넨 모욕적인 말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게 발단이 되어 폭력 사건에 휘말리고 몇 년 동안 감옥신세를 져야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출소 후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마치 다시 예전처럼 행동하면 또 감옥에 가야 하는 것처럼, 소피아는 항상 의기소침한 채 말을 잃고 수동적으로만 행동한다.


앨버트의 모욕에 응수하는 셀리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셀리의 독립과 소피아의 회복이 동시에 이뤄지는 식사 장면이다. 셔그로부터 용기를 얻은 셀리는 온 가족과 지인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앨버트의 조롱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독립을 선언한다. 늘 수동적이고 수줍기만 한 셀리의 독립 선언을 본 소피아도 잃어버렸던 과거의 모습을 되찾는다. 이 드라마틱한 식사를 계기로 셀리는 독립하여 어릴 적 헤어졌던 네티와 자식들을 만나고 소피아는 평등한 부부관계를 만들어나간다.


  원래 셀리는 현실을 견디지 못하는 다른 여성에게 “이 삶은 금방 끝나. 하지만 천국은 영원하지”라고 말했던 인물이었다. 즉 내세에 대한 희망으로 현재의 고통을 감당하며 행복을 유예해오던 여성이었다. 하지만 셔그가 셀리와 맺은 친밀한 관계가 모든 것을 바꿨다. 여자들끼리 주고받은 호의와 애정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많은 흑인 여성의 자립과 자긍심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린 시절의 셀리와 네티


  〈컬러 퍼플〉이 좋았던 건, 이렇게 오래전부터 여자를 돕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 왔다는 점 때문이었다. 백래시는 언제나 기존에 존재해오던 것들의 존재와 의의를 왜곡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계보를 만들어 이에 저항하면 된다. 여성들은 당신들이 규정하는 방식대로 관계 맺어오지 않았다고, 그러니 혐오와 차별을 멈추고 우리의 역사와 그로부터 가능해지는 미래를 존중해달라고 말이다. 2021년에 〈컬러 퍼플〉을 보며, 악의적 프레임에 삶의 기억으로 저항한다는 것의 의미를 곱씹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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