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다 세이어 피츠제럴드를 위한 투쟁

젤다 피츠제럴드. 《젤다》. 이재경 엮고 옮김. 에이치비프레스. 2019

by rewr
1.jpg 젤다 피츠제럴드. 《젤다》. 이재경 엮고 옮김. 에이치비프레스. 2019.


《남과 여에 관한 우울하고 슬픈 결론》은 자신의 재능을 갈아 남자의 명예를 드높여준 데 쓴 여성 11명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책의 분위기는 대체로 우울하다. 이 책에서 ‘남성 천재’와 ‘여성 조력자’의 구도는 구체적 자료를 근거로 신랄하게 비판되며, 그 대안으로 ‘여성 파트너의 재능을 착취한 남성 천재’의 이미지가 제시된다. 그중에는 우리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 스콧 피츠제럴드와 그의 사치스럽고 방탕한 아내로만 알려진 젤다 세이어 피츠제럴드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젤다》는 그녀의 단편소설과 산문을 모은 책이다. 우리는 미국의 또 다른 ‘대문호’ 헤밍웨이에 의해 스콧의 재능을 깎아 먹은 여자라는 이미지가 굳어졌고, 기껏해야 ‘스콧의 뮤즈’ 정도로 호평을 받는 게 고작이었던 그녀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볼 필요가 있다. 스콧은 악랄할 정도로 젤다의 재능을 도둑질했다. 젤다가 완성한 자전적 소설 《왈츠는 나와 함께》가 자신이 준비 중인 《밤은 부드러워》의 내용과 겹치자 분노하며 많은 부분을 들어내라고 요구했다. 젤다의 수필 〈F씨 부부를 방으로 모시겠습니다〉에서 ‘I’가 반복되자, “그놈의 ‘I’ 좀 집어치울 수 없어? 당신이 뭔데?”라고 말한 후 ‘I’를 전부 ‘we’로 바꾸었다. 젤다가 쓴 일기와 수필을 출판하자는 제안을 거부하고 이를 자기 작품에 가져다 썼다. 그나마 발표된 글은 대부분 스콧 단독 명의나 공저로 나갔다. 젤다가 ‘정신병’ 판정을 받자 의사에게 그녀가 자전적 소재로 글 쓰는 것을 금지하라는 처방을 내리라고 요구하기도 했는데, 이 일화는 그가 젤다의 말과 글을 폭력적‧지속적으로 도둑질해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일들을 하나하나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제는 스콧을 거치지 않은 젤다의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다.


《젤다》에 실린 그녀의 소설은 대체로 미국 재즈 시대(1920년대)의 낭만적‧서정적 정서와 여성의 삶이 버무려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리지널 폴리스 걸〉, 〈재능 있는 여자〉 등의 작품은 낭만‧환상이 자아내는 동경에 관한, 무엇보다 모두가 동경하는 화려한 삶을 영위하다가 어느 날 ‘과거’로 사라진 여자들의 이야기다. 《위대한 개츠비》의 또 다른 버전이라 할 만한 〈미친 그들〉도 재즈 시대 그 자체였던 젤다의 삶이 묻어나 굉장한 매력을 뿜는다. 〈남부 아가씨〉, 〈미스 엘라〉처럼 남부 여성의 삶과 사랑을 다룬 작품도 있다.


수필도 마찬가지다. 젤다는 그녀 인생의 상징과도 같았던 화려한 삶과 사랑에 관한 재치 있는 글들을 써냈다. 1920년부터 1933년까지 스콧과 함께 보낸 세월을 묶었던 호텔을 중심으로 풀어내는 〈F씨 부부를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 아껴온 물건이 결국 다락방에 처박힐 수밖에 없음을 역설적 유머로 표현한 〈경매-1943년형〉은 재즈 시대의 화신이었던 젤다가 살아낸 삶의 그 의미를 곱씹게 해준다. 자신의 옛날 일기를 몰래 훔쳐 출간한 스콧의 책에 대해 “아무래도 피츠제럴드 씨는 표절은 집안에서 시작된다고 믿나봐요”라는 익살맞은 서평(〈친구이자 남편의 최근작〉)을 남기는 그녀에게서, 시대를 가장 앞서갔으나 여자라는 이유로 온당한 인정을 받지 못한 쓸쓸함을 느끼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플래퍼(Flapper)에 관한 젤다의 수필들이다. 1920년대 미국의 신여성이라 부를 수 있는 플래퍼는 오리가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에서 나온 의성어다. 자신을 화려하게 꾸미며 거리를 당당히 활보하는 여자를 비아냥거리는 의도로 주로 사용되었던 말이다. 젤다는 〈플래퍼 예찬〉에서 “서른 살 여자의 노이로제와 이혼 소송은 죄도 플래퍼 탓”이라고 비난하는 사회에 조소를 금치 못한다. 젤다의 응수가 흥미롭다. 그녀는 플래퍼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진지하게 논하는 대신 ‘놀아본 여자가 잘 산다’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할 뿐이다. “연애와 극적 자기표현에 대한 욕망을 충분히 표출했던 여자들이 … 오히려 나중에 ‘난롯가 회귀’ 운동에 호의적인 태도를 가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능청스러움은 플래퍼를 보며 잔뜩 화가 난 사람들을 머쓱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늦바람나는 것보단 젊을 때 노는 게 낫잖아!’라는 젤다의 일침에 잔뜩 약 올랐을 얼굴들을 상상하니 괜히 통쾌해진다.


〈플래퍼 예찬〉이 비난받는 플래퍼를 위한 재치 있는 변론이었다면, 〈연지와 분〉은 플래퍼의 삶에 관한 보다 본격적인 분석이다. 젤다는 여성의 화장술을 남자들이 힘과 돈을 공적으로 자랑하고 과시하는 행위와 같은 층위에 둔다. “여자가 이웃보다 화장술에 능하다면 세상이 그녀 앞으로 경례하지 말란 법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젤다는 여성의 화장을 미국이 결여한 위대한 역사적 유산(이를테면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같은)을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까지 격상시킨다. 여자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면 극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점에서 젤다의 계산된 과격함은 빛을 발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비록 목이 잘릴지라도, 여성에게 부당히 배정된 영역(꾸미기)에서 최고를 추구함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면 이를 ‘성공’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젤다는 플래퍼로 영원히 살 수는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플래퍼는 어떻게 되었나?〉는 “찬란함과 용감함과 총기는 잠시 삶의 소용에 맡긴 채로”, “착한 플래퍼”가 되어버린 여성들을 다소 우울하게 기리는 글이다. 플래퍼는 젤다의 단편소설 속 주인공들이 그러하듯이, 어느새 소리소문없이 사라졌고, 플래퍼로서 향유했던 사랑과 낭만을 과거로 흘려보냈다.


프랑스의 위대한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보들레르는 민주주의라는 밀물이 모든 것을 평준화하는 상황에 공포감‧거부감을 느끼며, ‘댄디즘’을 “자기 정신의 귀족적 우월성”을 지키기 위한 행위로 극찬한 바 있다(《보들레르의 수첩》). 젤다와 보들레르 모두 인간의 꾸미기 노동을 인공적인 것을 활용해 자연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켜 존재의 의의를 확보하려는 적극적 행위로 본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보들레르는 문인들이 단 두 부류의 여성, 즉 “창녀 아니면 어리석은 여자”와만 교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여자는 “육체적 애인” 혹은 “살림꾼”뿐이다. 때문에 그는 재능 있는 여자가 이성을 발휘해 인공적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걸 상상할 수 없다. 보들레르의 ‘댄디즘’은 성차별적 권력구조에 기댄 남성의 특권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젤다의 플래퍼는 보들레르의 댄디보다 더 우월한 존재가 된다. 여성에게 재능, 이성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에서 인공적 아름다움을 창조하려면 댄디보다 더 큰 재능과 이성,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보들레르의 댄디가 안락한 세계에 살고 있는 멋쟁이 정도에 불과하다면, 젤다의 플래퍼는 가장 오래된 억압구조 속에서도 재즈 시대의 정수를 온몸으로 체화한 문화적 아이콘이다. 불리한 출발에도 불구하고 더 큰 성취를 이룬 플래퍼는 과연 ‘예찬’받을 만한 존재다.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보들레르와 스콧은 계속 위대한 예술가로 남을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의 성차별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될지는 몰라도 그들의 명성을 허물 순 없다. 젤다가 ‘스콧의 뮤즈’를 넘어 예술가의 지위를 얻으려면 앞으로도 더 많은 책과 논문이 나와야 한다. 여기에 보들레르와 스콧, 젤다를 수용하는 사회의 성차별 인식도 해체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에 나온 젤다의 평전이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오른 이후, 젤다에 대한 평가의 지형은 조금씩 움직여왔다. ‘스콧의 재능을 망친 여자’, ‘스콧의 뮤즈’를 넘어 예술가 젤다의 삶이 조금씩 조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나는 한국어로 번역된 스콧 소설의 해제나 옮긴이 후기에서 스콧을 예찬하는 글만 봤을 뿐, 그가 젤다의 재능을 착취해왔음을 진지하게 언급한 글을 아직 본 적이 없다. 내 기억력과 게으름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젤다의 삶을 ‘모범적 페미니스트’ 혹은 ‘페미니즘 정치가 지향해야 할 것’으로 복원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녀의 삶에 온당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젤다를 위한 투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