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트 쇼팽, 〈각성〉(열랜책들, 2019)
저명한 작가였던 케이트 쇼팽이 1899년 출간한 소설 《각성》은 다소 가혹하면서도 극적인 운명을 타고난 작품이다. 여성의 욕망과 사랑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그려낸 이 소설은 출간 초기에는 높게 평가되기도 했으나, 이내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출간이 금지되었다. 《각성》은 그렇게 묻혀 후대 독자를 만나지 못할 뻔했다. 이 소설이 다시 빛을 본 건 쇼팽 사후 60여 년이 흐른 1970년대 여성해방운동의 흐름 속에서였다. 《각성》은 페미니즘 소설의 선구로 여겨져 다시 주목받았고, 지금은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주인공은 에드나 퐁텔리에다. 그는 퐁텔리에와 결혼해 두 아들을 둔 여성이다. 퐁텔리에는 잘나가는 사업가로, 에드나에게 열정적으로 구애해 결혼에 성공했다. 퐁텔리에는 전형적인 사업가 남성이었다. 즉, 그는 에드나가 ‘여자로서’ 가정을 잘 꾸려나가길 바랐고, 그 역할에 그다지 정열적이지 않은 에드나를 다소 못마땅해했다. 에드나는 퐁텔리에에게 자신이 성공한 남자임을 과시하는 “값나가는 개인 소장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런 퐁텔리에의 품 안에서 에드나는 따분하고 무료한 일상을 이어간다. 변화가 생긴 건 휴양지에서 로베르라는 남자를 만난 후부터다. 솔직하지만, 다소 성급하고 서투른 데가 있는 로베르는 여러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곤 했는데, 로베르의 습관적 애정행각이 에드나의 고독과 만나 잔잔하던 그녀의 내면에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소설에는 에드나가 ‘느낄 수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 “에드나는 전율했고, 숨도 쉴 수 없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에드나는 그 빵을 뜯어 튼튼한 흰 이빨로 한 조각 씹어 먹었다.” 전율하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은 사랑할 수 있다. 왕성한 식욕은 활발한 성욕의 명백한 은유다. 비록 에드나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새로운 색으로 물들어 바뀌었다는 사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자기 마음과 욕망의 대략적인 방향성은 짐작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로베르를 향하고 있다.
로베르 역시 에드나에게 마음을 품게 되면서 둘 사이의 감정‧욕망의 농도는 점차 짙어진다. 하지만 로베르는 유부녀인 에드나와 추문을 일으키는 일에 덜컥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사업 핑계를 대고 잠시 에드나를 떠난다. 하지만 에드나는 멈추지 않는다. 여전히 로베르를 갈망하고 그리워하지만, 그가 없다고 자신의 욕망을 묵혀두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가족과 갈등을 빚고, 절친한 친구와의 거리가 멀어지기도 한다. 특히 남편인 퐁텔리에는 에드나가 “여성의 영원한 권리에 대한 무슨 사상”을 가진 것은 아닌지 우려하며 에드나가 “지적인 척하는 여성들, 아주 고상하며 잘난 척하는 여성들”과 어울리는 것은 아닌지를 걱정하는 의사와 우려 섞인 상담을 나누기도 한다. 단 한 번도 아내가 욕망과 사랑을 지닌 존재라는 걸 제대로 고려해보지 않은 퐁텔리에는 완연히 무르익어가는 에드나의 자아를 해석하는 데 극도로 무능하다. 그리고 에드나는 이 무능을 발판 삼아 더 멀리, 자신만의 세계로 도약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단절될수록 더 자유로워지는 에드나의 역설은 ‘가족’, ‘여성’의 이름에 자아‧사랑‧욕망이 억눌린 모든 여성의 비극을 대변한다.
본질적이지 않은 거라면 나도 포기할 수 있어요.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돈도 포기할 수 있고, 목숨도 바칠 수 있어요.
하지만 나 자신을 포기하진 않을 거예요.
결국 에드나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로베르와 재회하고 짧게나마 황홀한 나날들을 보낸다. 하지만 당대의 도덕관념은 에드나의 각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로베르는 또 한 번 ‘에드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먼 곳으로 떠난다. 에드나를 사랑한다면 그가 '정숙한 부인'으로 남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베르와의 완전한 결별 후, 에드나는 지금 그녀가 발 딛고 있는 세상에서는 온전한 자아실현이 불가능함을 자각한다. 즉, “평생 망상에 사로잡혀 바보처럼 사느니 고통스럽더라도 결국 깨어나는 게” 낫다는 두 번째 각성을 한다. 첫 번째 각성이 마음과 육체의 감각과 욕망에 대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 각성은 완전한 자신을 위해서는 이 세상과의 단절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이다. 에드나의 마지막을 묘사하는 아래의 문장을 보자.
자맥질하며 앞으로 헤엄쳐 나갔다
몸을 살며시 꼭 안아 주는 바닷물의 감촉이 관능적이었다.
케이트 쇼팽은 마지막 순간까지 에드나의 관능을 강조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여성이 ‘가정의 관리자’, ‘아이의 양육자’로서의 역할만 꿈꿀 수 있었던 시절에 적극적으로 자기 욕망을 이야기하는 여자의 존재는 불쾌하고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에드나의 죽음은 완전한 자유를 향하 나아가는 적극적 행위인 동시에, 남성중심적인 사회의 여성 살인이기도 하다.
이중의 의미를 품은 에드나의 죽음은 동시대에, 그리고 후대에 다양하게 변주되어 반복되어 왔다. 《각성》은 여러 여성소설, 페미니즘 소설과 맞닿은 지점이 있다. 욕망하는 여성을 그린다는 점에서는 《마담 보바리》를, 관계를 조화롭게 꾸리는 책무를 떠맡은 여성의 고단함을 그리는 부분에서는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와 《댈러웨이 부인》이 떠오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으로써 자유로워지는 여성을 그렸다는 점에서는 도리스 레싱의 단편 〈19호실로 가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 등을 강력하게 환기한다. 즉, 《각성》은 동시대의 걸작들과는 유사한 문제의식을 형상화했고, 후대의 창작물에게는 참고할 만한 여성 서사의 전범으로 자리했다.
물론 지금은 욕망하는 여자가 죽어야만 자유를 찾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욕망을 특정한 방향으로 정향하려는 규범이 존재한다. 자신을 자신이게끔 하는 육체와 감정의 욕망이 억압되는 한, 결코 완전한 자유는 도래하지 않는다. 《각성》은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을 이어나가는 데 중요한 원천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