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레싱 〈19호실로 가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집 《19호실로 가다》에서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는 대체로 두 개로 나뉜다. 노동계급 출신의 남자가 교육을 통해 상류층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두 세계가 얼마나 이질적인지를 드러내는 〈영국 대 영국〉을 제외하면, 두 세계는 주로 남자의 세계와 여자의 세계로 구분된다.*
흥미로운 건 작가가 두 세계를 그려내는 방식이다. 표제작이자 이 책에서 가장 압도적인 작품인 〈19호실을 가다〉는 ‘전통적’ 페미니즘 소설로 독해될 모든 요소를 갖고 있다. 왜 “누구라도 스스로 선택할 수만 있다면 선택하고 싶은 삶”을 사는 여자가 분노에 잠식되어 가는지, 왜 그녀가 점차 남편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가는지, 사랑스러운 아이와 세심한 남편이 있는 그녀는 왜 익명성이 보장되는 “절대적인 고독”을 갈망하는지, 왜 그녀는 분노와 좌절을 느낌에도 “그런데 내가 해야 하는 말이 도대체 뭐야?”라고 혼란스러워하는지 등등. 결혼하고 출산하여, 가정을 꾸려나가는 여성이 삶으로부터 소외되는 과정을 이토록 치밀하고 적확하게 그려낸 작품은 흔치 않다. 〈19호실로 가다〉는 결혼한 이성애 여성의 ‘알 수 없는’ 우울이 다정한 남편의 문제, 상호 간 배려의 문제 따위가 아닌 불평등한 젠더 권력의 문제임을 강렬하게 환기한다.
한편 다른 작품들의 정서는 〈19호실로 가다〉와 다소 다르다. 〈19호실로 가다〉의 주된 정서가 분노와 혼란, 그리고 절대적 고독을 향한 갈망이라면 다른 작품들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건 냉소적 풍자다.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는 어떻게든 마음에 드는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 하는 남자의 우스꽝스러운 욕망을 그린다. 주인공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눕히겠다”고 결심한 채 여성에게 추근거린다. 그런데 여성의 말이 흥미롭다. 그는 남자와는 달리 상대에게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바쁜 그녀는 그의 추근거림이 귀찮아 “나랑 같이 자요. 됐죠? … 얼른 끝내죠?”라고 말한다. 남자의 간절함이 여자에겐 대충 처리하고 치워버릴 하찮은 대상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이는 〈옥상 위의 여자〉에서도 마찬가지다. 건물 옥상에서 작업하는 남성 노동자 세 명은 근처 건물 옥상에서 태닝을 하고 있는 여자를 발견한다. 셋 중 둘은 그녀가 자신들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에 화를 느끼고(자신과 아무 관련이 없는 모르는 남자에게 가질 만한 당연한 태도임에도), 또 다른 한 명은 자신만의 환상 속에서 그녀와의 사랑을 키워간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 용기를 낸 마지막 남자에게 돌아온 건 “화를 내는 것도 지친다는 표정”뿐이다. 그러자 남자에게 엉뚱한 분노가 솟구친다. “저런 데서 일을 하라고 하다니!” 자신을 받아주지 않은 여자를 향한 분노가 일터에 대한 분노로 전이된 것이다. 여자에게 거절당한 남자들의 ‘정당한 분노’가 다른 방향으로 표출될 수 있다는 건, 여자에 대한 분노가 가득한 남자들이 득세하는 지금의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외에도 아기를 출산한 이후의 미묘한 갈등을 섬세하게 보여주면서도 왜 이성애 결혼이 여전히 공고한지를 그린 〈한 남자와 두 여자〉, 남자 예술가를 조력만 하다가 버림받은 두 여자의 취기 어린 도원결의를 그린 〈남자와 남자 사이〉, 젊고 예쁜 여성 부하직원이 ‘다정한’ 자기가 아닌 돈과 권력을 가진 사장을 선택하는 것에 분노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목격자〉 등 《19호실로 가다》에는 여자를 욕망하는 못난 남자와 이를 조롱하면서도 여기에 기대는 여자, 그리고 그들이 사는 세계의 기울어진 풍경을 폭로하는 작품이 실려 있다.
여기서, 작가가 ‘윤리적’ 관점에서 이들을 재현하지 않는다는 걸 언급할 필요가 있다. 도리스 레싱은 여성이 놓인 현실의 모순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따뜻한 시선, 혹은 분노에 찬 시선으로 이를 그리는 작가가 아니다. 오히려 모순이 드러나는 지점을 극단으로 몰아붙여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그러다 보니 그의 작품에는 비판받을 요소가 생긴다. 이를 테면, 〈목격자〉의 여성 주인공들은 남성의 모순을 폭로하기 위해 지나치게 전형적인 방식(과대망상에 빠져 노처녀 히스테리에 시달리거나 철딱서니 없는 말괄량이 등)으로만 그려진다.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관능적인 특징이 강조된 여성 캐릭터, 〈남자와 남자 사이〉에서는 독립성이 부재한 채 남자에게만 기대는 여성 캐릭터가 나온다.
이는 도리스 레싱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최종적으로는 불합리한 젠더 권력을 폭로하지만,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성차별적 캐릭터 묘사가 반복되는 레싱의 작품은 그가 관찰한 현실을 솔직하게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문제적 과장과 진실의 폭로라는 이중의 효과를 얻는다. 이중 어디에 더 중점을 둘지는 독자의 몫이다.
*〈내가 마침내 심장을 잃은 사연〉, 〈방〉, 〈두 도공〉에는 이러한 구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이 작품들에서는 별다른 매력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