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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May 16. 2022

강간, '개별 사건'이 아닌 '구조적 폭력'

넷플릭스 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2019) 리뷰


  실화를 바탕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성폭력 피해자가 견뎌야 하는 시간을 다룬다. 평범한 일상의 중단,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시간의 누적, 그리고 고통. 드라마는 피해자의 시간과 경찰의 시간, 피해자 주변 인물의 시간을 한데 엮은 후 동일한 물리적 시간 위에서 펼쳐지는 서로 다른 시간성이 야기하는 긴장감을 몰입감 있게 그려낸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는 피해자의 시간을 가운데에 들여놓음으로써 무엇이 정의인지를 질문한다.     


  위탁 가정을 오고 가다 이제 막 독립한 청소년 마리는 어느 날 새벽 강간을 당한다. 범인이 복면, 신발끈, 배낭, 카메라 등의 장비를 챙겨 와 범행에 활용한 거로 봐서 계획된 범죄가 확실하다. 범인은 몇 시간 동안이나 지속된 강간 후에 마리의 몸에 남아 있을지 모를 자신의 흔적을 지우려 그녀에게 씻으라 강요하고, 경찰이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할 정도로 현장을 깔끔히 정리하는 치밀함도 보인다. 혼란스럽고 경황이 없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마리에겐 그녀를 살뜰히 돌봐준 위탁모들과 그녀의 상처를 진심으로 보듬어주고자 하는 친구들이 있다. 범인만 검거된다면 주변의 도움으로 마리의 일상은 빠르게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건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그 시작은 위탁모 주디스였다. 주디스는 담당 형사인 파커를 불러 마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 근거는 사건 후 마리의 행동이 강간당한 피해자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어릴 때부터 가족 없이 외롭게 자라 관심을 갈구해왔던 마리가 사건을 꾸며냈다는 뉘앙스다. 파커 형사는 주디스의 관점을 곧바로 수용한다. 주디스와의 만남 이후, 파커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사건 현장이 지나치게 깔끔한 건 범인이 치밀해서가 아니라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리가 여러 번 반복한 진술에 서로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파커는 조금은 차가워진 태도로 마리를 다시 심문한다. 이전에는 파커의 질문이 진술 사이의 공백을 메워 범인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진술의 모순을 찾아내는 것으로 그 목적이 바뀐다.



   형사들이 자기 말을 믿지 못한다는 것에 당황한 마리가 잠시 머뭇거리자 곧바로 거센 추궁·압박이 이어진다. 마리는 그날의 기억·경험이 의심받는다는 데 충격을 받는다. 그래서였을까? 잠시 후 마리는 눈물 흘리며 너무 생생한 꿈을 실제 일어난 일로 착각했다고 진술을 번복한다. 자기 인생의 가장 끔찍한 경험이 그 아픔을 해결해줘야 할 자들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한 그 짧은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마리의 표정이 압권이다. 그건 정말이지 커다란 좌절과 충격이었다.     


  결국 사건은 마리의 허위진술로 종결된다. 소문이 퍼지자 마리를 가까이에서 위로해주던 사람들의 태도가 완전히 바뀐다. 이제 마리 주변에는 아무도 남지 않는다. 모두가 그녀를 거짓말쟁이 취급하여 멀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경찰서에서 마리를 형사고발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온다. 허위진술로 경찰력‧행정력을 낭비했다는 이유에서다.     



  혹시 마리의 진술이 거짓이었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시작될 때쯤, 카메라의 앵글이 바뀐다. 또 다른 강간 사건을 수사 중인 형사 캐런 듀발. 그녀는 피해자를 향한 사려 깊은 태도와 범인을 향한 집요함, 강간이 인간 삶을 망가뜨리는 심각한 범죄임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는 형사다. (특히 그녀가 피해자와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모든 경찰이 그 장면을 보고 배웠으면 싶을 정도다.) 책임감을 갖고 사건을 파헤치던 듀발은 인근 지역에서 같은 패턴의 사건이 발생했다는 걸 알게 되고, 그 사건의 담당 형사인 그레이스와 팀을 꾸려 본격적으로 범인을 좇는다. 남자가 절대 다수인 경찰 조직에서 두 여성 형사가 팀을 이뤄 강간 사건을 해결하려는 장면은 묘한 안도감을 준다. 누군가는 사명감을 갖고 피해자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 말이다. 결국 마리의 진술은 거짓아 아니었음이, 캐런과 그레이스가 쫓던 범인이 마리도 강간했음이 밝혀지고 마리는 자신을 고소한 행정당국으로부터 그녀가 원하는 만큼의 보상을 받아낸다. 무엇보다 마리는 일상을 되찾는다.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두 형사의 집요함이 자신의 상처와 억울함을 달래주었다는 데서 다시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드라마가 파커 형사를 그려내는 방식이다. 파커는 우리가 으레 생각하는 무능하고 꽉 막힌 형사가 아니다. 마리의 진술이 진실이었음이 밝혀지자 진심으로 부끄러워하며 마리에게 사과하고 자책하기도 한다. 이게 핵심이다. 오랜 경력을 가진 베테랑 형사인 그는 형사의 양심을 걸고 일했는데도 마리의 진술이 거짓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가 여성 피해자의 진술은 의심부터 하고 드는 덜떨어진 마초 형사가 아니란 소리다.

     


  파커에게 부족한 건 공감 능력과 구조적 맥락에 대한 무지였다. 캐런과 그레이스가 어떻게 범인을 잡았는지를 보면 마리 진술의 정합성과 사건의 개연성에만 초점을 맞춘 파커가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 수 있다. 캐런과 그레이스는 피해자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했고, 동일범에 의한 더 이상의 피해자가 생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며, 집요하게 범인 검거에 몰두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여성이 놓인 구조적 어려움에 대한 데이터다. 그들은 파커처럼 하나의 사건에만 머리를 파묻고 있는 대신, 다양한 연구‧통계자료를 참고하여 여성 대상 범죄가 발생하는 구조적 맥락을 파악한 후 그를 바탕으로 용의자의 범위를 좁혀 나간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여성 대상 범죄는 ‘개별적 사건’으로 이해하기보다 ‘구조적 폭력’으로 이해할 때 진실에 더 빠르게 다가갈 수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능력 있는 두 여성 형사가 강간범을 검거했다는 데 박수를 보내는 것만큼이나, 마찬가지로 유능한 경찰인 파커가 왜 마리의 진술을 의심하고 그녀를 고발까지 했는지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개별성을 말살하는 집단성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사회적 약자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놓인 공통적 맥락에도 관심을 둬야 한다. 여성 대상 범죄를 개별 폭력 사건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면 된다는, 대선 기간에 나온 한 정치인의 말과 앞으로 그가 펼칠 정책이 심히 우려스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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