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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Jun 06. 2022

사랑에 권태가 왔을 때, 피학과 가학

영화 〈팬텀 스레드〉


  사랑에 권태가 왔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집착, 노력, 자극, 헌신, 방치 등의 방법이 떠오른다. 영화 〈팬텀 스레드〉가 선택한 건 가학과 피학이다. 감독의 최근작인 〈리코리쉬 피자〉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멜로영화다. 〈리코리쉬 피자〉가 현실감과 추억을 맛깔나게 버무렸다면, 〈팬텀 스레드〉는 귀신같은 솜씨로 ‘논리적인 치정’라는 형용모순을 영화화했다.     


  런던의 한 고급 의상실. 레이놀즈 우드콕은 최상류층 고객이 즐겨 찾는 최고의 드레스 디자이너다. 그는 편집증적 예민함을 가졌는데, 누구도 정해진 규칙을 어겨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된다. 그의 ‘창작’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우드콕의 규칙이 가장 강력하게 적용되는 대상은 그의 연인(혹은 수동적인 뮤즈)이다. 우드콕은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나면 드레스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빌미로 그녀를 유혹한다. 그리고 드레스를 통해 ‘여자의 환상’을 실현시켜줌으로써 그녀의 몸과 정신을 서서히 잠식해나간다. 그러나 ‘뮤즈’가 ‘연인’의 자리를 넘보며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우드콕은 그녀를 버린 후 새로운 뮤즈를 찾는다. 이것이 런던 최고의 의상실이 운영되는 방식이다.     


  알마는 우드콕의 연인을 꿈꿨으나 끝내 버림받은 수많은 여인의 마지막 후임이다. 시작은 똑같았다. 알마는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접근해 아름다운 드레스를 만들어주는 우드콕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의 의상실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종종 예민함이 깃든 우드콕의 통제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아직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마음이 더 크다.     



  그런 우드콕이 알마를 특별히 여기게 된 계기가 있다. 우드콕의 드레스에 진심 어린 자부심을 느끼는 알마는 돈만 많은 품위 없는 여자가 우드콕의 드레스를 입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우드콕의 드레스를 입은 채 술에 취해 누워 있는 여자에게서 강제로 드레스를 벗겨낸다. 우드콕은 알마의 이 대담한 행동에서 그녀가 ‘허영심만 가득 찬’ 다른 여자들과는 다른 존재임을 깨닫는다. 알마가 드레스에 쏟은 자신의 ‘예술혼’을 알아봤다고 여긴 것이다. 우드콕은 이 사건 이후 알마에게 더 큰 애정을 쏟는다.     


  하지만 아직 알마의 시간은 오지 않았다. 알마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우드콕과 동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환상은 금세 깨진다. 알마가 극복해야 할 현실은 그녀의 생각보다 더 냉혹했다. 우드콕은 알마를 조금 특별한 뮤즈로 여길 뿐, 동반자·연인으로 대하지 않는다. 알마에겐 더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알마의 선택은 ‘독’이다. 여러 이야기의 여성 주인공들이 독을 활용해 남자들을 꺾어왔다. 과하게 추하거나, 넘치도록 아름다운 여성이 사악한 표정으로 알 수 없는 재료들을 솥에 넣고 끓이는 장면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야기 장르에 따라 요술이나 마법이 추가되기도 한다. 자신의 갖고자 했던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알마가 선택한 ‘악녀’의 길이다. 우드콕의 다른 뮤즈들처럼 소모되고 버려지길 거부했던 알마는 우드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선배 여성들이 걸었던 길을 걷는다. 물론 목표는 다르다. 알마는 그를 죽여 의상실을 차지하는 것, 즉 권력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알마에겐 우드콕과의 사랑이 목적이다. 그래서 우드콕을 죽이지 않고 약하게 만든다. 약해진 우드콕은 점점 알마에게 의존하는 존재가 되어간다.     



  독은 알마에게 그가 지금껏 갖지 못했던 힘을 안겨준다. 오랜 세월 우드콕의 곁을 지키며 최측근 역할을 해왔던 그의 누나 세실마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워질 정도다. 결정타는 우드콕을 치료하러 온 의사를 친절히 대하는 알마를 보며 우드콕이 느끼는 질투다. 드레스를 빌미로 알마의 몸과 정신을 사로잡고 통제했던 우드콕은 돌봄과 감정의 영역에서는 추락하여 알마의 노예가 된다. ‘악녀’의 계보를 뒤틀어 자신의 상황에 맞게 적용한 알마가 끝내 도달한 곳은 ‘사랑’이었다.     


  영화의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알마가 독이 든 재료로 요리하는 걸 알면서도 우드콕이 이를 먹는 장면, 즉 스스로를 취약한 상태에 내던져 알마에게 자기 존재를 의탁하는 장면이다. 그는 이 순간 알마에게 “사랑해”라고 말한다. 이는 “당신이 쓰러지길 원해요. 힘없이, 나약하게, 무방비 상태로 내 도움만 기다리며…”라는 알마의 말에 대한 완벽한 응답이다. 우드콕은 알고도 독을 먹는다. 그럼으로써 “내가 낫게 해줄 거예요”라는 알마의 욕망에 복종한다. 알마와 우드콕에겐, 이 가학과 피학으로의 자발적 복종이 사랑의 완성이다.     


  윤리, 옳고 그름의 문제는 잠시 접어두자. 그리고 이들의 가혹한 실험에 깃든 간절함에 주목해보자.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아 사랑에 괴로워하는 존재들에게 이들의 실험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다가갈 것이다. 누구에게나 무슨 수를 쓰든 옆에 두고 싶은 사람은 있는 법이다. 게다가 이 욕망이 상호적이고 둘 다 동의한다면,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가학과 피학으로 사랑의 권태·위기를 넘는 〈팬텀 스레드〉는 사랑을 유지하려는 소망의 여러 발현 중 가장 기괴한 판본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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