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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Aug 21. 2023

이토록 '괴랄한' 가족

〈세자매〉 리뷰

7★/10★


  〈해피뻐스데이〉에서도 느낀 거지만, 이승원 감독은 가족 이면에 달라붙은 괴상함(저런 장면과 설정은 어떻게 상상했을까 싶은, ‘괴랄함’이 더 적합한 표현일지도 모르는 것들)을 들춰내는 데 탁월한 감독이다. 이는 평온해 보이는 일상이 사실은 모두가 참고 참아낸 결과라는 것, 즉 ‘사회화’가 우리 내면의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승원 감독의 영화가 종종 관객을 숨 막히게 하는 건 이 때문이다. 위태롭게 지속되는 일상의 허약함을 폭로함으로써 자조적 해방감을 선사한달까.     


  우리 모두가 그렇듯, 세 자매에게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에 큰 괴리가 있다. 첫째 희숙은 꽃집을 운영하며 딸과 산다. 도무지 화를 내는 법이 없이 착하기만 하다. 희숙이 화를 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데도 그렇다. 사채를 쓴 희숙의 남편은 주기적으로 찾아와 돈을 요구하고 그녀를 만날 때마다 ‘여자 얼굴’, ‘여자 몸매’ 운운하며 인신공격성 발언을 일삼는다. 그래도 희숙은 웃는다. 무명 로커를 쫓아다니는 딸은 엄마에게는 영 무관심하다. 집에서 제멋대로 담배를 피우는 딸은 반항심 충만한 나이를 지나고 있다. 가장 심각한 건 희숙이 자해를 한다는 점이다. 자해의 도구는 장미꽃의 가시, 나뭇가지 등이다. 그녀는 자해를 할 때마다 마음이 편해짐을 느낀다. 희숙이 TV를 보다가 갑자기 일어나 허벅지를 찌르는 장면에서 선보인 평온한 표정은 자해가 그녀 일상의 아주 자연스러운 일부임을 보여준다. 그런 그녀에게 암이 찾아온다. 남에게 폐를 끼치며 산 적 없이 착하게만 살았는 데도 말이다.          



  둘째 미연은 넓은 아파트에서 대학교수인 남편, 아들딸과 함께 산다. 교회 성가대 지휘자답게 늘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을 유지한다. 그런데 겉모습이 번지르르한 만큼이나 문제도 심각하다.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어 친정 식구들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로도 벅찬데 남편이 성가대의 젊은 여자와 바람까지 난 것이다. 그녀는 심지어 이 문제마저 ‘우아하고 기품 있게’ 해결하려 하지만 영 쉽지 않다. 외면의 고상함을 유지하려 할수록 속은 썩어만 간다.          


  극본을 쓰는 셋째 미옥은 비록 애 가진 유부남이긴 하지만 선하고 건실한 남편과 결혼해 함께 산다. 연극계 선배가 그녀가 결혼할 때 남편의 돈을 보고 결혼했다는 말이 돌았다는 말을 전하며 은근히 속을 긁는다. 그래도 어쨌든 미옥의 외적 조건은 그리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실패했다는 자괴감에 늘 술에 취해 있다. 극본은 써지지 않고 자격지심은 늘어간다. 결혼으로 생긴 아들과의 관계 설정도 고민이다. 핸드폰에 자신을 ‘돌+아이’라고 저장해둔 아들에게 그럴듯한 엄마가 되어주고 싶지만 현실은 마음 같지 않다.          



  그리고 회합. 〈해피뻐스데이〉에서 그러했듯 ‘문제’ 많은 가족 구성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모든 걸 폭파하는 때가 온다. 전작이 잔혹함과 평온함이 공존하는 기괴한 봉합이었다면, 〈세자매〉에서는 치유를 통한 갈등 해소가 화두다. 사실 세 자매는 정신질환을 앓는 막내 남동생 진섭과 함께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지독한 폭력에 시달려왔다. 아버지는 그 와중에서도 전부인과 현부인의 아이를 차별했다. 전부인의 아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매일 폭력에 시달려야 했고, 현부인의 아이들은 그런 그들을 보며 죄스러운 마음에 괴로워하고 폭력을 외면하는 어른들에게 좌절했다.          


  이제는 회개하고 교인이 된 아버지의 생일날 극적인 사건이 생긴다. 진섭이 아버지에게 오줌을 갈기는 것이다. 이는 치유되지 않은 폭력의 상처와 그것이 씨앗 되어 생겼을 남매의 썩어버린 내면을 한데 모아 모두의 화제로 만드는 극적인 사건이다. 세 자매는 수십 년간 가슴에 품었던 울분과 의문을 쏟아낸다. 압권은 아버지의 사과다. 아버지는 연신 식사 자리에 초대된 목사에게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인다. 미연이 말한다. “사과하세요. 목사님한테 말고 우리한테. 지금 사과하세요.” 아버지의 사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틀렸다. 첫 번째는 방향이다. 그가 정말 ‘회개’했다면 목사가 아닌 자녀들에게 먼저 사과했어야 했다. 두 번째는 시점이다. 그가 정말 ‘회개’했다면 한참 전, 즉 회개한 그 순간 자식들에게 사과했어야 했다. 그러나 가정폭력 가해자인 아버지에게는 사과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자기 분을 못 이겨 쿵쿵 소리를 내며 머리를 유리창에 박는다.          



  때때로 파국은 평온의 다른 이름이다. 해소되지 못하고 응어리진 것들이 폭발하는 파국 이후 내면을 새로이 채울 계기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세 자매/네 남매는 공통의 폭력을 심문한 후 상처받은 자들끼리의 연대로 내면의 공백을 메운다. 이승원 감독은 주로 가족이라는 주제에 천착하여 ‘괴랄함’을 선보이고 해소하지만, 세 자매/네 남매가 보여준 화해와 치유의 방식은 모든 폭력의 생존자들에게도 유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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