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교토에서 온 편지〉
모계는 기록되지 않는다. 유전적‧정서적으로 부계보다 모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 과학이고 현실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공식적으로는’ 부계에 기입된 존재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교토에서 온 편지〉는 세 자매와 엄마의 삶을 좇으며 이 기록되지 않은 계보가 어떻게 복원되고 활성화되는지를 보인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후 세 딸은 엄마와 함께 삶을 꾸렸다. 첫째 혜진은 의류매장 매니저로 일하며 ‘K-장녀’로서 집안의 생계를 주로 책임지고, 둘째 혜영은 작가를 꿈꾸고 서울로 향했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부산의 고향 집으로 내려온 상태다. 막내 혜주는 엄마와 언니들 몰래 춤을 배우며 서울에서의 생활을 꿈꾼다.
화자는 세 자매의 엄마다. 평생 돌봄으로 가정을 꾸려온 화자는 지금도 노인에게 도시락을 전하는 일을 하며 돌보는 일을 이어가는 중이다. 그런 화자에게 치매가 찾아온다. 자꾸 무언가를 깜빡하고 급작스레 딸을 호출해야 하는 일도 생긴다. 평생 남을 돌봐온 화자지만 정작 자신이 돌봄이 필요한 상태가 되자 당황스럽다. 집에 머물며 세 딸 중 화자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혜영은 엄마의 치매 진행을 늦추기 위해 자주 옛 기억을 들추며 엄마가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
화자와 혜영의 대화는 엄마가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재일교포였다는 데 이른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부모의 서로 다른 국적을 밝히면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환대받지 못한다는 걸 배운 화자는 혜영에게조차 이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지 않는다. 그러던 중 혜영은 엄마에게 온, 일본어로 쓰인 편지를 본다. 화자가 한국으로 넘어올 때 제대로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채 헤어진 엄마가, 즉 세 자매의 외할머니기 보낸 편지였다.
화자가 감추고 싶은 기억이 조금씩 드러나는 동시에, 세 딸이 버텨내는 현실의 무게는 점차 버거워진다. 혜진은 꿈만 좇는 ‘무책임한’ 동생들과 돈을 버느라 소진되어가는 자기 삶이 안타깝고, 혜영은 자꾸만 멀어지는 꿈 때문에 괴로운 상태며, 혜주는 엄마와 언니가 자기 꿈을 응원해주지 않는 상황이 불만이다. 그리고 치매에 걸린 화자의 침울함과 각기 다른 이유로 촉발된 세 딸의 분노가 한자리에 모여 동시에 분출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나 오히려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인 후 새로운 국면이 도래한다. 각자에게 기대되는 통상적 가족 역할을 말없이 수행하는 대신, 그 역할과 자신의 현재가 어떻게 부딪히는지를 쏟아내자 기존과는 다른 관계를 정립할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화자도 마찬가지다. 화자는 꼭꼭 감춰온 속내를 꺼낸다. 화자는 교토에 가고 싶다. 오래전 편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서.
세 딸과 함께 간 일본. 편지의 발신지는 정신병원*이었다. 그러나 너무 오래전 환자라 기록이 남아 있질 않았다. 즉 공적 기록으로는 혜진, 혜영, 혜주 그리고 화자의 모계를 더는 추적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여성들은 비록 공적 기록으로 남기지는 못했더라도 일상적 돌봄과 서로에 대한 연민/연대의 마음으로 관계를 다져왔다. 세 자매와 화자가 모계를 복원하는 데 ‘실패’했음에도 그 실패를 함께 겪어냈다는 감각으로 현실에서 새로운 자리를 벼려내듯이. 이들의 이야기는 무한히 다채로운 모녀 관계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관계 역동이 빚어내는 재생산/돌봄 노동에 빚진 사람에게 잔잔한 위로를 전한다. 딱딱한 공적 기록으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을 무언가 찐득한 것이 기록되지 않은 모계를 새로이 의미화해나간다는 데서 오는 위로 말이다. 현실에 착근한 이들의 이야기는 기록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를 질문하며 ‘기록할 만한 것’의 영역을 넓힌다. 감각되고 기억됨으로써. 사라지지 않고 존재함으로써.
*‘정신병-치매-세 자매의 현재적 고난’이라는 연관관계로도 가부장제하에서의 모계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