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wr May 08. 2023

웰메이드 퀴어 로맨스, 상상력의 임계에 도달했나?

〈파이어버드〉 리뷰

6★/10★


  1977년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의 에스토니아 소련 공군 부대. 친구들과 함께 군 생활을 하던 세르게이에게 운명과도 같은 만남이 찾아온다. 상대는 파일럿인 로만 중위다. 둘은 금세 서로의 특별함을 알아본다. 엄격하고 강압적인 분위기의 긴장감 넘치는 군부대에서 여유와 품위가 깃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은 당연히 서로의 눈에 띄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로만이 배우를 꿈꾸는 세르게이를 응원하고 세르게이가 그만의 감수성으로 촬영한 사진을 인화해주며,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져 이내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던 중 로만이 상관의 호출을 받는다. 로만이 동성同姓 군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며 로만을 ‘옹호’해주는 또 다른 상관의 말에도 불구하고, 로만을 호출한 소령의 표정은 냉혹한 의구심으로 가득하다. 소령은 로만에게 군대 내 동성애 행위가 발각되면 5년간 수감될 수 있음을 엄중히 경고한다.



  때때로 적절한 방해는 오히려 사랑의 힘을 증폭시킨다. 로만과 세르게이는 더욱 조심스럽게, 그러나 한편으로는 더욱 뜨겁게 서로의 몸과 영혼을 욕망한다. 금기 따위가 둘 사이를 가로막을 수는 없다는 듯이. 하지만 금기는 실재하는 권력이다. 로만을 의심하는 소령은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고, 로만과 세르게이가 맞이하는 위기의 순간도 점점 잦아진다.


  결국 로만은 모든 걸 부정하기로 마음먹는다. 로만은 세르게이를 사랑하는 만큼 국가도 사랑하고 파일럿이라는 직업도 사랑한다. 때문에 그는 세르게이와의 사랑을 단념하여 나머지 사랑을 ‘지키고자’ 한다. 차가운 표정으로 세르게이에게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고, 여성인 루이자와 결혼하고, 그 결혼식에 세르게이를 초대하며, 루이자와 아들을 낳음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로만은 억지로 선택한 사랑의 틈새로 무언가가 자꾸 비집고 나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군대를 떠나 배우 생활을 하고 있는 세르게이를 다시 찾고, 그에게 밀월여행을 제안하며, 다시 옛날처럼 사랑을 속삭인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탈’일 뿐이다. 늘 둘의 관계에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된 세르게이와 달리 로만은 지켜야 할 것이 많은 겁쟁이에 불과하다. 루이자가 둘의 관계를 알고 나면서는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닫는다. 평범하게 사는 게 좋을 거라는 소령의 겁박은 끝내 ‘완전한 현실’이 되어 로만에게서 불온한 친밀성의 흔적을 말끔히 지운다. 당사자들은 분명하게 느끼는 사랑이 존재한 적이 없다고 말해야만 하는 상황이 강제된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혐오뿐 아니라 처벌 규정까지 실재했던 시대의 두 남성 로맨스는 금기를 수반하는 사랑의 형태가 어떠한지를 비춘다. 세르게이와 로만이 함께 수영을 즐기는 바닷가의 물결처럼, 금기 속에서 피어난 둘의 사랑은 때로는 빛나도록 아름답지만 때로는 처연할 정도로 쓸쓸하다.



  그러나 동시에 〈파이어버드〉는 기존 웰메이드 퀴어 로맨스 영화에서 우리가 이미 경험한 기시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파이어버드〉의 장면 구성과 감정선에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자주 떠오른 것을 그저 우연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표절이라는 소리가 아니다. 웰메이드 퀴어 로맨스의 상상력이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로 장르의 역량이 쌓였다는 소리다. 분명히 체감할 수 있는 기존 퀴어 로맨스 영화의 임계를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또 다른 퀴어 로맨스가 나오지 않는 한, 관객을 완전히 사로잡았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성과를 재현하는 일은 요원하다.



*이 영화는 시리즈온, 티빙, 왓챠, 웨이브 등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엇이 장애인을 ‘장애인’이게 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