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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May 01. 2023

무엇이 장애인을 ‘장애인’이게 하는가

〈복지식당〉 리뷰

7★/10★


  장애등급제는 장애인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한다는 목적으로 1998년에 제정되었다. 이후 장애인은 장애 정도에 따라 1~3급(중증), 4~6급(경증)으로 나뉘어 차등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수많은 장애의 양상이 고작 여섯 개의 등급에 완전히 들어맞을 리 없다. 존재를 등급으로 나누어 차등하는 일은 언제나 딱 맞지 않는, 경계에 있는 존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영화 〈복지식당〉은 장애등급제가 어떻게 제정 목적과는 정반대의 효과를 야기하는지를 고발한다. 주인공은 “누가 봐도 1급”인데 장애등급 심사에서 5급 판정을 받은 재기다. 재기는 교통사고로 ‘중증’ 장애를 입었으나, 팔을 들어 올릴 수 있고 몇 미터나마 걸을 수 있다는 이유로 ‘5급’ 판정을 받는다. 결과는 재앙이다. ‘5급’은 사사건건 재기의 발목을 잡는다. 활동보조를 신청할 수도, 장애인 콜택시를 지원받을 수도 없다. 모두 ‘중증’ 장애인에게만 제공되는 복지 혜택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전동휠체어 구입 지원을 알아보려 건강보험공단에 문의하지만 공단 직원은 장애인 단체에 가서 상담을 해보라고만 말한다. 장애등급을 재지정받기 위한 행정심판을 알아보는 재기에게 ‘업무 방해’ 운운하며 짜증을 내는 공무원도 있다. “왜 진작 5급이라고 말 안 해서 사람 헷갈리게 해요?”라는 수모는 그에게 일상이다. 즉, 재기에게 장애 등급을 부여한 국가는 있지만 재기의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는 없다. 국가는 멍에만 줄 뿐 그 무엇도 책임지지 않는다. 제도와 인간의 뒤바뀐 위계에 권위를 부여하여 장애인을 수치심과 좌절의 영역에 방치할 뿐이다.


  취업도 마찬가지다. 재기는 민관이 함께 마련한 장애인 취업 면접에 참여한다. 그러나 면접관은 ‘제대로 걷고 물건도 들 수 있는 사람(경증 장애인)’만 채용한다고 말한다. “제대로 걷고 물건도 들 수 있으면 그게 장애인인가요? 비장애인이지”라는 재기의 대꾸에는 깊은 분노와 좌절이 담겼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가닿지 못하고 공허히 흩어진다. 그렇다고 중증 장애인을 채용하는 회사에 취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재기가 ‘5급’이기 때문이다. 모든 게 이런 식이다. 지팡이를 지원받을 때, 행정심판 비용 마련을 위해 은행에 대출받을 때도 등급이 문제다. 현실과 등급의 불일치는 재기가 가는 모든 곳을 끈덕지게 따라다니며 그를 괴롭힌다.



  〈복지식당〉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재기는 복지 제도의 모순과 공백을 영악하게 이용하는 장애인에게도 소외당한다. 병호는 재기가 병원에 있을 때 만난 지체 장애인으로 어려움에 처한 재기에게 행정심판을 위한 변호사 소개, 장애인 콜택시 지원, 장애인 스포츠 선수 등록 등 여러 호의를 제공한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재기에게 병호의 호의는 큰 도움이 되고 둘은 금세 서로 호형호제하며 가까워진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병호의 호의가 재기 삶에 대한 통제로 변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병호는 이를 위력으로 전환해 금전적‧감정적 착취를 일삼는다. 심지어 홀로 아들을 키우는 재기의 사촌누나에게도 자신이 재기의 안위를 손에 쥐고 있다고 뻐기며 치근덕거린다. 병호는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어 단단한 카르텔을 형성하여 위력을 획득했다. 재기뿐만 아니라 장애인 지원센터, 활동보조인 모두가 병호의 위력 아래 있다. 병호가 동료 장애인을 데리고 장애인 활동지원 센터를 옮기면 그 센터는 망하고, 병호에게 밉보이면 활동보조로 일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병호는 장애등급제의 허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장애를 가진 채 태어나 가족에게 버림받고 시설에 들어갔다가 18살에 나온 그는 제도의 틈새에서 자신의 ‘살 자리’를 찾았다. 장애인에게는 ‘집단 내 밥그릇 싸움이 유일한 생존 수단’이라는 감독의 말**은 병호의 주도면밀한 ‘악랄함’이 어떻게 가능해졌는지를 가늠케 한다. 요컨대 병호는 장애인에게 주어지는 제도적 수혜의 최대치를 활용하는 데 능숙하다. 이는 병호에게 이용당하다 버림받은 재기가 끝내 가지지 못한 것이다.



  병호에게 굽신거리기를 거부하는 재기가 그에게 맞는 등급을 부여받아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 복지제도의 은유인 ‘식당 메뉴판’은 과연 모든 장애인이 누려 마땅한 권리를 알기 쉽게 전달하는 언어로 다시 쓰일 수 있을까? “부디 제가 자립해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장애 등급을 재지정해달라는 판사를 향한 재기의 호소는 제대로 응답받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마침내 복지 제도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한다는 본래의 목적에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은 ‘무엇이 장애인을 장애인이게 하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으로 나아간다. 재기는 단 한 번도 장애 그 자체 때문에 좌절하지 않는다. 장애가 곧 불행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재기가 등급과 상관없이 활동보조와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할 수 있었다면, 경제 활동을 할 수 있었다면, 공적 권력이 자신의 책임을 다해 병호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면, 애초에 인간에 ‘등급’을 매겨 차등 지원하는 폭력적 발상이 없었다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정(假定)들은 늘 재기를 배반하는 방식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재기를 ‘불행’하게 만든다. 병호의 호의로 잠시나마 긍정적인 미래를 그릴 수 있었을 때, 재기가 행복한 표정으로 웃는 장면 역시 그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장애 그 자체가 아님을 짐작케 한다.


  2022년, 장애인 이동권 시위로 생긴 큰 ‘소란’이 해가 바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장애인은 다른 소수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중에게 더 큰 ‘온정적’ 시선을 받는다. 하지만 이들에게 필요한 건 호의가 아닌 권리 보장이다. 장애인이 자신에게 허락된 선을 넘은 결과는 처참했다. 재기가 행복할 가능성을 배반한 여러 가정이 그러했듯, 섬세하고 꼼꼼하게 질문되어야 할 문제들은 비장애인들의 ‘불편함’과 대립하는 구도에 갇혀 이번에도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복지식당〉은 권리 보장을 외치는 장애인의 몸과 말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사회에 대한 영화적 개입이다. 재기가 묻는다. 무엇이 장애인을 ‘장애인’이게 하는가.



*진보적 장애인 단체는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싸워왔다. 이들의 주장은 일부 수용되어 현재는 장애가 중증과 경증의 두 단계로 나뉜다. 그러나 장애인 단체의 요구는 장애등급제의 ‘완전한’ 폐지다.


**김소미, “‘복지식당’과 함께 장애인 권리 투쟁의 현실을 돌아보다”, 〈씨네21〉, 2022.04.21.


★이 영화는 시리즈온, 티빙, 웨이브, 쿠팡 플레이, 왓챠 등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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